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씨의 진술조서가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윤씨가 작성했다는 진술서는 초졸 학력을 가진 윤씨가 쓸 수 없는 어휘들이 다수 담겼으며 필체도 달라 대필이 강하게 의심된다.
게다 피해자 시신엔 화성 연쇄살인 2차 사건에서 발견된 이춘재의 시그니처가 남아 있었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윤씨는 사건에 휘말리기 전까지 가족처럼 함께 살았던 농기계 수리점 사장 부부와 30년 만에 재회했다.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려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2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치밀한 조작인가? 살인범의 게임인가?-화성 8차 사건의 진실’이라는 부제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에서 13살 박모양이 자신의 방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부검 결과 목이 졸려 살해당했고 사체엔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발견됐다.
이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경찰에 잡힌 범인은 22세 농기계 수리공 윤씨였다. 경찰은 해당 사건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모방범죄라고 결론 내렸다. 윤씨가 경찰에 붙잡힌 지 5시간 만에 자백했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은 또 박양의 시신에서 윤씨의 음모가 발견됐다며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결국 윤씨는 무기징역을 받고 20년을 복역한 뒤 50대가 돼 교도소를 나왔다. 그 후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됐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경찰 수사를 받던 이춘재는 수원과 청주에서 살인사건을 포함해 14번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아울러 8차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윤씨는 이 사실을 알고 “자백해준 이춘재에게 고맙다”고 했다. “잡혀간 날 저녁을 먹을 때였다. 한 숟갈 뜨는데 최 형사가 손을 잡았다”고 한 윤씨는 “차에 탈 때 수갑을 찼다. 그때는 나 하나 죽는다고 신경도 안 쓸 것 같았다. 3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자백을 하라더라. 자백을 하면 사형보다는 낫다고. 사체에서 내 음모가 나왔다는데 왜 나왔을까 궁금하다. 그건 조작인 것 같다”고 회상했다.
제작진은 윤씨의 진술조서를 단독 입수했다. 윤씨는 자신이 썼다는 진술서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씨는 제작진에 “형사들의 말을 듣고 받아쓴 건 기억난다”고 했다. 10여 장에 이르는 윤씨의 진술조서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윤씨가 쓰기엔 어려운 어휘들이 다수 발견됐다. 윤씨의 조서 작성엔 당시 윤씨가 일했던 농기계 수리점 사장이 입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장의 말을 달랐다.
“형사들이 윤씨를 잡아가기 한 달 전부터 지켜봤다고 하더라. 너무 섬뜩했다”고 한 사장은 “조서 작성이 다 끝나고 다음 날 오라고 해서 갔다. 내가 가서 윤씨를 부르는데 날 몰라보더라”고 했다. “그때 느낌에 쟤가 매를 맞은 건가,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이상하고 생각했다”라고 한 사장은 “네가 했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그런데 그때 경찰이 녹음된 내용을 들려줬다. 끝부분에 ‘제가 했습니다’하는 말이 나왔다. 다른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게 전부다”라며 조서 작성에 입회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는 또 조서에 나와 있는 시각 윤씨가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외출을 한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집 구조상 누군가 외출을 하면 모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손으로 경운기를 돌려 손에 항상 기름때가 범벅인데 현장엔 기름때가 전혀 없었다”고 강조한 사장은 진술조서가 석연찮다고 의심했다. 실제 당시 현장이나 범인이 벗긴 것으로 드러난 피해자 옷엔 기름때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체모에서 티타늄이 검출돼 용접공이었던 윤씨가 용의자로 특정되는데 한몫했다. 그러나 현재 수준의 과학수사로 본다면 윤씨가 근무하던 농기계수리점보다는 이춘재가 근무하던 전기회사가 생산한 제품에 알루미늄, 망간, 티타늄이 원료로 쓰인다는 점에서 관련이 깊다.
제작진은 또 증거로 수집된 체모에서 검출된 혈액형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지역 주민들은 8차 사건 후 B형의 남자들은 거의 다 체모를 뽑아갔으며 학생들도 잡아갔다고 회상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 못한 체모와 모발이 8차 사건 때는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됐다. 당시 국과수 생물학과장인 최상규 박사는 “피해자의 몸에서 음모 10여 개가 발견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제작진을 만난 최 박사는 “경찰이 증거물을 갖고 왔는데 음모가 발견됐다고 하더라”며 “모양도 특이했다. 파상모로 파도 물결이 있는 음모였다. 혈액형 검사를 여러 차례 했고 오류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체모에서 발견된 티타늄 성분을 근거로 윤씨를 용의자로 특정한 경찰은 윤씨에게 찾아와 여러 차례 체모를 뽑아달라고 했다.
윤씨는 사건 당시 담을 넘었다고 진술했지만 유년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윤씨는 담을 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수사관들은 “담을 넘는 것을 봤다. 담을 넘어 착지까지 제대로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장 검증을 지켜본 이웃들의 증언은 달랐다. “담에 올라가라고 하니까 애가 못 올라갔어. 그니까 옆에 있는 벽돌을 놓으면서 올라가려고 하더라”고 한 이웃은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형사들이 옆에서 붙잡고 다리를 올리게 했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이춘재는 담을 넘지 않고 문을 통해 침입했다고 자백했다. 범행 장소가 자신의 집 인근이며 범행 후 도주에 용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시신에 이춘재의 시그니처도 발견됐다. 부검 사진을 본 법의학자는 피해자 목에 드러난 상처에 대해 “주택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소음에 신경을 썼을 거다. 입안에 뭔가 가격 후 집어넣고 목을 졸랐을 가능성이 있다”며 “굉장히 노련한 범죄자 스타일이다. 부검 사진을 보면 몸에 있는 상처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화성 연쇄살인 2차 사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윤씨가 자백을 해 더 수사할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2차 조사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냐고 묻자 “더 강하게 무죄를 어필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사건을 맡았던 형사들은 1계급 특진을 했다.
2심 재판을 맡았던 주심은 “판결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그 당시 그 정도 증거가 나오면 유죄를 선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의견을 제작진에 보냈다. 당시 사건을 맡은 국선변호사도 “1심에서 자백한 사건이니까 재판부는 윤씨 사건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방송 말미엔 윤씨가 사건에 휘말리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농기계 수리점 사장의 가족이 윤씨를 30년 만에 만났다. 가족들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윤씨도 “나 때문에 사업에 타격을 입었을텐데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한편 윤씨는 지난달 26일 경찰서를 찾았다.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는 윤씨는 재심을 앞두고 있다. 윤씨의 재심은 약촌오거리 사건에서 누명을 풀었던 박준영 변호사가 맡고 있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