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해 중국 상하이 미화서관(美華書館)에 있던 로리기념교회가 독립운동가들의 연설회와 예배가 진행됐던 해방공간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연 정기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자로 나선 이혜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를 통해서다.
미화서관은 당시 상하이 북경로 18호에 있던 미국북장로교 출판사였다. 중국 전체에서 가장 컸던 출판사로 기독교와 일반 서적 출판을 비롯해 선교사들에게 숙소까지 제공하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됐다.
상하이한인교회는 1919년 3월부터 6~7개월가량 출판사 마당에 있던 로리기념교회를 예배공간으로 사용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던 시기와 맞닿아있어 이 공간과 독립운동가들과의 관련성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역사학계의 공감대다.
이 교수는 “상하이한인교회가 빌려 사용하던 로리기념교회는 예배처소뿐 아니라 기독교 인사들의 강연과 인성학교(한인학교) 졸업식, 한인 대형집회 등에 폭넓게 활용됐다”면서 “임시정부 초기 교민과 독립운동 단체들이 수시로 연설회도 열었다”고 했다. 그는 “1919년 5월 26일 상하이에 갓 도착한 안창호의 연설이 개최됐던 곳도 바로 로리기념교회였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이날 일본외교사료관자료도 인용했다. 일본측 사료에는 “조선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 하비로 232호에 설치하였다. 그 비밀 인쇄소는 북경로 18호에 있고…”라고 기록돼 있다. 임시정부와 북경로 18호에 있던 미화서관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하이한인교회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예배 장소를 ‘하비로 강녕리 교민단사무소’로 옮긴 이유도 드러났다. 이 교수는 “가옥세까지 내야 했고 훨씬 비좁았던 공간으로 이전한 건 1920년 5월 미화서관이 매각됐기 때문”이라면서 “1920년 2월 인성학교의 ‘소년극’이 로리기념교회에서 열린 이후로 더이상 모임을 가졌다는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1919년 상하이한인교회가 빌려 사용했던 예배 공간의 위치는 그동안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국민일보가 지난 4월 12일 ‘상해한인교회, 1919년 자리잡은 터 찾았다’라는 보도를 하면서 밝혀졌다.
그동안 알려져 있던 사실은 ‘북경로 18호’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주소체계가 바뀌면서 과거 주소로는 현재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실마리는 이 교수가 1884년 제작된 ‘상해현성상조계전도’가 발굴하면서 풀렸다. 지도에는 북경로 18호가 정확히 기록돼 있었고 그 자리에 미화서관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었다. 북경로 18로와 상하이한인교회, 미화서관과 로리기념교회가 모두 한 자리에 있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