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갈라타사라이’가 이런 팀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하고 갔겠습니까.”
‘형제의 나라’ 터키가 e스포츠 업계에선 임금체불의 나라로 통하고 있다.
‘발칸’ 최현진은 서머 시즌 개막을 앞두고 ‘터키시 챔피언십 리그(TCL)’ 소속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했다. 스프링 시즌 ‘오세아닉 프로 리그(OPL)’ 봄버스를 우승으로 이끈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5월18일부터 9월18일까지 4개월간, 매달 5000 달러(약 600만원)씩 총액 2만 달러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 임금 지급일은 6월30일, 7월30일, 8월15일, 9월15일이었다.
갈라타사라이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최현진은 첫 임금 지급일이었던 6월30일에도, 두 번째 지급일이었던 7월30일에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그는 스크림 보이콧을 선언하는 등 임금 미지급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나섰다. 8월 중순이 돼서야 팀으로부터 ‘3달 치 급여를 8월23일까지 지급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아냈다.
31일 충남 당진에서 최현진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먼 이국땅에서 치른 외로운 싸움에 대해 하나하나 솔직하게 묘사했다.
“플레이오프 시작(8월 중순) 이틀 전에 ‘임금을 받기 전까진 스크림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보이콧을 선언했어요. 그제야 돈을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팀은 그전에도 임금을 지급했다고 하거나, 사정이 있어서 지급하지 못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반복했었어요. 갈라타사라이는 워낙 큰 팀이기도 하니 저는 계속 기다렸었고요.”
갈라타사라이는 터키의 종합 스포츠클럽이다. 자국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축구단을 비롯해 농구, 배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의 팀을 운영한다. 1905년 창단했으니 클럽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는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는 2016년 뛰어들었다.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임금 지급은 8월15일이 돼서야 이뤄졌다. 갈라타사라이는 6월과 7월에 지급하기로 했었던 임금을 이날 최현진에게 보냈다. 이마저도 게임단주의 사비로 마련한 돈이라고 했다. 이들은 다음 주 중으로 8월 치 임금을 추가 지급하겠다고 재차 약속했으나, 끝내 지키지 않았다.
팀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갈라타사라이는 최현진과의 계약 만료일인 9월18일이 돼서야 입을 열었다. 이틀 뒤인 9월20일에 나머지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약속을 어겼다. 갈라타사라이는 현재까지 최현진에게 8월과 9월 치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상에서 터키 지역의 임금 체불 이슈가 공론화됐다. 갈라타사라이가 최현진 외에도 여러 선수의 임금을 체불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프링 시즌 갈라타사라이에서 서포터로 활동했던 ‘톨러런트’ 바르슈 체프니올루가 SNS를 통해 폭로한 내용이었다.
최현진은 ‘톨러런트’의 폭로글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갈라타사라이는 최현진에게 임금을 지급할 테니 해당 글과 팀에 대한 비판 등을 SNS에서 지워달라고 요구했다. 최현진이 관련 글을 삭제하자 갈라타사라이는 재차 입을 닫았다. 최현진은 10월 말 다시금 SNS를 통해 임금 체불 사실을 공개했다.
최현진에 따르면 터키에 진출해있는 선수 대다수가 임금 체불로 시름을 앓고 있다고 한다.
“갈라타사라이의 오너는 최근까지도 SNS를 통해서 ‘임금을 지급했다’고 주장하던데, 8월14일까지만 해도 저는 물론 현지 선수들과 코치들도 임금을 받지 못했었어요. 매니저와 SNS 관리자도 마찬가지였고요.”
“터키로는 다시 갈 생각이 없어요. 저도 이적하기 전부터 많은 소문을 들었어요. 터키는 ‘임금 체불이 기본으로 깔린 나라’라는 소문과 인식이 박혀 있는 곳이에요. 대다수 프로게이머가 공감할 거예요. 그런데 제가 당할 줄은 몰랐죠. 갈라타사라이는 규모가 작은 팀이 아니니까요.”
업계 관계자들은 최현진 외에도 많은 한국 선수들이 터키 내에서 임금 체불을 경험했으며, 지금까지도 체불당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 관계자는 “솔로 랭크 점수가 낮다는 핑계로 벌금을 매겨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은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이밖에 스프링과 서머 시즌을 다른 팀에서 활동했지만 여태껏 각 팀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한 선수도 있었다.
한국 프로게이머들은 터키를 피해가야 할 지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대형 스포츠 클럽이나 축구단을 모기업으로 삼은 1907 페네르바흐체와 부르사스포르, 지역 내 최고 인기팀인 슈퍼 매시브 정도만이 신뢰할 만한 팀으로 여긴다.
이 사실이 수면 위로 떠 오르지는 않는다. 선수들은 임금 체불 문제가 법정 싸움으로 번질 때 견뎌야 할 피로감을 두려워한다. 팀과 계약 관계로 묶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스토브 리그가 시작되기 직전 ‘업계 문제아’ 또는 ‘내부고발자’로 찍히는 상황을 꺼리는 경우도 많다.
최현진은 갈라타사라이의 임금 미지급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호소했다.
“프로게이머들한테는 오프시즌의 한국 서버 솔로 랭크 점수가 무척 중요해요. 그런데 임금 체불로 멘털(정신력)이 무너지니까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10일 만에 솔로 랭크 점수가 챌린저 950점에서 500점까지 떨어졌어요. 이런 일은 흔치 않아요. 솔로 랭크 점수를 올려서 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선 무척 신경이 쓰이죠.”
최현진의 에이전트 업무를 맡고 있는 이앤프로스포츠는 터키 현지 에이전시를 통해 갈라타사라이에 항의 중이다. 그러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팀으로부터 명쾌한 답변을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라이엇 터키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에이전시는 라이엇 코리아 측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다. 라이엇 코리아 관계자는 “연락을 취해본 결과 라이엇 터키 측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관련 조사가 상당 부분 진행됐고, 선수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을 팀에 이미 권고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전했다.
당진=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