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다음 달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격 취소하면서 미국, 중국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한국 정부의 구상에도 차질이 생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APEC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등을 만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등 현안을 논의하려 했지만, 칠레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 탓에 APEC 회의 자체를 취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조우’ 기회도 사라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31일 APEC 정상회의가 취소된 것과 관련해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당초 다음 달 13일 멕시코를 공식방문해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16~17일 APEC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APEC이 취소되면서 멕시코 방문도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는 APEC에서 주요 4대 강국들과 정상회담을 추진해왔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한·미 방위비 분담금, 북·미 실무 협상 등 논의해야 하는 현안이 많다. 시진핑 주석과도 정상회담이 필요한 상황이다. 금강산 남측 시설 철수 등 경색이 장기화하고 있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중국의 협조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PEC이 취소되면서 회담 기회를 뒤로 미뤄야 하는 상황이 됐다.
APEC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조우 가능성도 사라졌다. APEC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작았다. 하지만 두 정상이 얼굴을 마주할 자리는 만들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무산된 것이다. 최근 두 정상은 문 대통령의 모친상, 일본에 큰 피해를 준 태풍 ‘하기비스’ 등을 계기로 위로전을 주고받는 등 ‘서신 외교’를 이어가고 있었다.
APEC 취소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는 다음 달 3일부터 5일까지 태국에서 열리는 아세안+3(한·중·일) 회의와 12월 한·중·일 정상회의 등 2차례가 남아 있다. 특히 아세안+3회의는 다음 달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기한 만료를 앞두고 양 정상이 마주칠 수 있는 마지막 다자회의다. 이 자리에서 양 정상이 조우할 순 있지만, 한·일 관계 현안을 논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일 갈등이 최근의 우호적 기류에도 장기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