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원 분노에 ‘칠레 크라이시스’… APEC 취소 초유사태

입력 2019-10-31 04:15
칠레 돈 30페소는 우리 돈으로 따지면 48원 정도다(31일 오전 환율 기준). 소액이지만 이 돈으로 촉발된 시위 사태로 개막까지 17일 앞둔 대형 국제회의가 취소됐다. 열흘 넘게 이어진 시위로 20명이 숨졌고 수천명이 연행됐으며 지하철 곳곳에 붙에 탔다.

29일(현지시간) 산티아고 대통령궁 근처에서 분노한 시위대가 붙인 불로 바리케이트가 타고 있다. AFP연합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최근 몇 주간 칠레와 모든 국민이 겪어온 어려운 상황”을 이유로 내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12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 개최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혼란으로 국제회의의 정상적인 개최가 쉽지 않은 데다 국제회의 개최보다 ‘집안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형 국제회의 개최를 코앞에서 취소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다 칠레 정부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제회의 개최는 문제없다”고 자신해왔기 때문에 이번 결정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국가로 자부해온 칠레 정부로서는 대외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난 6일 수도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 인상이 도화선이었다.

정부는 유가 상승과 페소화 가치 하락 등을 이유로 지하철 요금을 출퇴근 피크 타임 기준 800페소(약 1280원)에서 830페소(약 1328원)로 인상했다.

칠레의 반정부 시위대. EPA연합

시민들은 분노했다. 잦은 공공요금 인상과 높은 생활 물가로 누적된 불만이 폭발했다. 이어 칠레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양극화를 향한 분노로 번졌다.

칠레의 소득 불균형은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칠레에선 상위 1%의 부자들이 부의 26.5%를 소유하고 있다. 하위 50%가 2.1%의 부를 나눠 가졌다.

칠레의 올해 최저임금은 월 30만1000페소(약 49만7000원)이고, 근로자의 절반은 월 40만 페소(약 66만원) 이하로 생활한다.

우리나라 최저임금 월 환산액 174만원이나 근로자 평균 월급 295만원(2017년 기준)과 비교하면 소득은 훨씬 낮은데 지하철 요금은 서울보다 비싼 것이다.

부실한 사회안전망도 빈부격차 확대에 기여했다.

분노한 칠레 시위대. EPA연합

1973∼90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절부터 시행된 공공서비스 민영화로 연금은 턱없이 낮고, 의료비나 전기·수도요금 등은 너무 비쌌다.

교육비 부담 역시 너무 높아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일상이 된 불평등에 지쳐 있던 칠레인들은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을 알람 삼아 깨어났다.

시위대는 ‘칠레 깨어났다’(Chile Desperto)라는 구호를 앞세운 채 연금과 의료비, 교육, 세제 등 사회 전반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시위 초기 정부의 안일한 대처도 시위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지하철 요금 인상 직후 시위는 학생들 중심으로 소규모로 이어졌다.

그러나 18일 시위가 갑자기 과격해지며, 혼란을 틈탄 방화와 상점 약탈로까지 번진 데에는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이 오히려 싼 수준이며, 요금 인상 철회는 없다”고 못 박은 교통장관의 발언이 영향을 미쳤다.

많은 이들이 출퇴근을 위해 하루 2∼3시간을 대중교통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도 경제장관은 “피크타임 할증 요금을 피하려면 더 일찍 일어나라”고 말했다.

피녜라 대통령도 시위 초기 비상사태 선포와 야간 통행금지 발령 등 강경 대응에 집중하며 칠레가 폭력 시위대와 “전쟁 중”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칠레의 분노한 시위대가 30일(현지시간) 경찰차에 올라타고 있다. 로이터연합

시위대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한 고위 공무원들의 발언은 ‘1% 부자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키웠다.

지하철 요금 인상 철회 이후에도 시위가 오히려 확산하자 시위대의 요구가 간단치 않음을 뒤늦게야 알게 된 정부는 연금과 임금 인상, 의료비 부담 완화, 개각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지만 시위대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열흘 넘게 대규모로 이어진 시위로 지금까지 20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연행됐다. 지하철역과 건물 곳곳이 불에 타 재산 피해도 상당하다.

지난 25일에는 10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와 1990년 민주화 회복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수십 년간 누적된 국민의 분노, 이를 헤아리지 못한 정부의 무심한 대응은 칠레 곳곳에 상처를 남기고 국제회의 개최 취소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이 분노가 앞으로 어디까지 미칠지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