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는 20만년 전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지역에서 처음 출현했고, 13만년 전 기후변화로 이주를 시작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칼라하리는 현재 보츠와나 북부의 사막지대다.
이 연구결과는 한국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악셀 팀머만 기후물리연구단장(부산대 석학교수) 연구팀이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팀과 공동으로 도출했다. 연구진은 인류가 13만년 전 지구 자전축의 흔들림으로 인한 기후 변화로 조성된 ‘녹지 통로(green corridor)’를 따라 최초의 이동을 했다는 주장도 내놨다. 연구진은 “초기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IBS는 28일 “팀머만 단장 연구팀을 포함한 국제 연구진이 현생 인류의 정확한 발상지와 이주 원인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고 밝혔다. 연구결과는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처 온라인판에 29일 오전 1시에 실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 최초의 인류가 등장했는지는 과학계의 논란 거리였다.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유골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발견됐으나 가장 오래된 혈통은 남부 아프리카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한국·호주·남아공 공동 연구팀은 아프리카 남부에 사는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DNA를 추적해 인류의 발상지를 현재 보츠와나 북부의 사막지대로 지목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인 잠베지강의 남쪽으로 나미비아, 짐바브웨 국경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초베국립공원, 오카방고델타 등 유명 관광지가 이곳에 있다. 지금은 사막이지만 20만년 전에는 대규모 습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유전학 기술은 미토콘드리아DNA 분석을 통해 인류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DNA는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 따라서 여러 사람의 미토콘드리아DNA를 모아 역추적하면 한 어머니 또는 어머니집단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과학계는 그 공통의 어머니를 ‘미토콘드리아 이브’로 부른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L0’라는 혈통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 남부의 일부 지역에선 지금도 L0 혈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연구진은 L0 혈통의 후손 198명을 새로 찾아내 기존의 표본 1019개와 합쳐 더욱 정밀한 L0 유전자 계통 지도를 완성했다.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희귀 하위 계통도 여기에 추가됐다.
새롭게 완성된 유전자 계통 지도는 L0 혈통 1217명의 공통의 조상이 생존했던 시대가 언제인지 알려줬다. 기존 연구에서 추정한 17만5000~15만년 전보다 더 빠른 20만년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L0 혈통이 언제 하위계통으로 갈라졌는지를 분석해 인류의 최초 이동시점도 13만년 전으로 추측했다.
연구진은 이와 함께 20만년 전 등장한 인류가 7만년 동안 칼라하리 지역에 머물다가 이주한 이유가 기후 변화 때문이었다는 분석 결과도 발표했다. 옛 기후 자료와 기후 컴퓨터 모델을 분석해 25만년 전부터 현재까지 남아프리카의 기후 변화를 재구성한 결과 2만1000년 주기로 바뀌는 지구 자전축의 느린 흔들림(세차운동)이 남반구의 여름 일사량을 바꿨고 이 영향으로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강수량이 주기적으로 변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이를 근거로 13만년 전 기온 상승과 강수량 증가로 남아프리카에 녹지 지대가 풍부하게 조성됐고 인류는 이 길을 따라 북동쪽(현재의 잠비아와 탄자니아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L0 유전자 계통 지도에서 이주 시기로 추측한 13만년 전과 일치한다. 연구진은 약 2만년 뒤인 11만년 전에는 녹지 지대가 칼라하리 남서쪽(현재의 나미비아와 남아공 지역)에서 조성돼 그 방향으로 인류가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IBS의 팀머만 단장과 이순선 연구위원은 이번 연구에서 옛 기후 재구성과 지질학적 데이터 분석 등을 담당했다. 세계적 기후물리학자인 그는 부산대가 2017년 기후물리연구단을 설립하면서 미국 하와이대에서 영입한 인물이다. 팀머만 단장은 “이번 연구는 유전학적 증거와 기후물리학을 결합했다는 의의가 있다”며 “앞으로 L0 외에 다른 혈통의 이주경로도 추적해 초기 인류 역사의 수수께끼를 계속해서 풀어나가겠다”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