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분쟁 느는데 예산 없어 자문 구하고 37억원 못 준 정부

입력 2019-10-27 17:14 수정 2019-10-27 19:56
올해 예산 부족으로 해외 로펌에 못 준 돈 37억
글로벌 로펌과 신뢰관계 악화 우려
한국 통상환경 나빠져… “제때 필요한 대응 못할 수도”


정부가 일본 수출규제 등 한국을 둘러싼 통상분쟁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해외 법무법인(로펌)에 자문을 구하고도 예산 부족 때문에 자문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 겪는 통상분쟁은 최근 몇 년 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분쟁에 대응할 ‘실탄’이 부족해 제때 필요한 대처를 못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달라진 통상 환경에 맞춰 적절한 규모의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7일 공개한 ‘2020년 예산안 분석’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세계무역기구(WTO) 당사자 분쟁 대응사업 예산으로 162억6100만원을 편성했다. 올해 예산안과 추가경정예산안을 합친 97억3600만원에서 65억2500만원을 증액했다. 이 가운데 37억8200만원은 올해 예산 부족으로 주지 못한 돈(미지급금)이다.

미지급분 대부분은 국제통상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해외 로펌 자문료다. WTO 통상분쟁은 제소에서부터 최종심 판정까지 3~4년 걸린다. 최종심 판정 이후에도 이행 여부에 따라 또 다른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법률적 대응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한국이 통상분쟁의 당사자가 되면 국내외 로펌 가운데 통상분쟁을 전문으로 하는 로펌을 자문 대상으로 선정한다.

그런데 예산 부족으로 해마다 미지급금이 발생한다. 2014년과 2016년애는 각각 3500만원, 1800만원의 예산이 부족했지만, 산업통상자원부 내 다른 예산을 전용해 집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등의 통상분쟁이 급증하면서 15억9300만원이 부족하게 됐다. 정부는 이 미지급분을 올해 예산으로 집행했다. 올해는 한·일 조선 보조금 분쟁 등으로 통상분쟁 규모가 커지면서 미지급금 규모가 37억8200만원까지 늘었다.

가용예산 부족으로 자문료를 늦게 지급하면 글로벌 로펌과의 신뢰 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 한 통상 전문가는 “대다수 글로벌 로펌이 한두 번이야 고객 관리 차원에서 자문료 지급 지연을 양해하겠지만, 계속 지급 지연이 발생한다면 한국 정부의 신뢰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가용예산 소진 상태에서 새로운 통상분쟁이 발생하면 제때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산업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현재 진행 중인 6건의 소송비용만 계상한 상황이라 승소 후 이행단계에 있는 4건을 비롯해 추가 소송이 발생하면 예산 부족으로 미지급금이 또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산업부 관계자는 “일본 수출규제 대응 과정에서 편성된 예산이 부족한 상황이 되면, 기획재정부를 통해 예비비로 처리할 수도 있다”며 “금액 부족으로 당장 분쟁 대응 체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을 둘러싼 통상 환경은 녹록지 않다. 일본과의 수출규제 뿐 아니라 유럽연합(EU)은 한국의 조선업 보조금 정책, EU산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 등에 이의를 제기한다. EU는 WTO 제소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한국을 겨냥한 통상 분쟁은 2014년 2건에서 지난해 9건으로 증가했다. 산업부는 내년까지 15건(누적집계)의 통상분쟁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한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