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공작 사건’과 관련해 “조직적 댓글 활동은 없었다”는 취지의 위증을 교사한 윗선은 유죄가 확정되고, 거짓 증언을 한 혐의를 받던 국정원 직원은 1심 무죄선고를 받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위증을 하라고 시킨 교사범은 있는데 위증한 사람은 없다는 모순적인 판결이 나온 셈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부장판사 박상구)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재판에서 위증한 혐의로 기소된 국정원 직원 김하영(35)씨에게 최근 무죄를 선고했다고 27일 밝혔다. 김씨는 201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오피스텔에서 댓글 작업을 하다 당시 야당 의원들에게 발각돼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을 촉발한 인물이다.
검찰은 남재준 전 국정원장, 서천호 전 국정원 2차장, 이제영 전 검사(국정원 법률보좌관실 파견)등 윗선이 댓글공작이 조직적 범행이란 점을 숨기기 위해 김씨 등 직원들에게 위증을 교사했다고 봤다. 이들이 김씨에게 “개인적으로 활동했다” “‘이슈 및 논지’(댓글 활동 지침)는 구두로 받은 것”이라고 증언하도록 지시했다는 게 검찰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그러나 “남 전 국정원장 등의 위증교사가 유죄로 확정된 사정만으로는 교사 받은 대로 위증한 것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위증을 교사해 처벌 받은 사람은 있는데 실제로 위증한 사람은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문제는 남 전 국정원장 등의 위증교사 혐의를 심리한 1·2심 재판부는 ‘김씨의 위증 사실이 인정된다’는 취지로 판시했다는 점이다. 대법원도 지난 3월 이들을 유죄로 확정하면서 법리 오해 등 위법이 없다고 밝혔다. 김씨에게 위증을 직접 교사한 혐의 등으로 징역 1년6개월을 받았던 이 전 검사는 지난 5월 만기 출소했다.
법조계의 의견은 엇갈린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위증교사는 위증 범행이 실행돼야 성립한다. 법리상으로는 위증이 무죄면 위증교사도 성립 안 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형법상 교사범은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된 만큼 반드시 유죄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취지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다만 김씨의 위증 혐의가 무죄로 확정돼도 남 전 국정원장 등의 재심이 열리긴 힘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심은 증거물의 위·변조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는 등 재판의 전제가 된 사실관계의 변경이 있어야 가능하다”며 “이번 사건 같은 법리상의 문제에는 적용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