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지난해 2월 5일 항소심 선고 이후 627일 만이다. 검은 정장에 회색 넥타이를 맨 그는 내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굳은 얼굴에 긴장감이 엿보였다. 이 부회장 변호인은 대법원에서 유무죄 판단을 끝낸 만큼 양형 심리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25일 뇌물공여 등 혐의로 기소된 이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 5명에 대한 파기환송심 1차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앞으로 진행될 공판 방식에 대해 검찰, 변호인 측 의견을 듣고 30여분 만에 공판을 종료했다.
이 부회장 측은 “일부 쟁점에 대해서는 대법원 파기환송 취지에 따라야 하고, 오로지 양형 판단을 심리해야 한다”며 “저희는 대법원 유무죄 판결에 대해 다투진 않겠다”고 밝혔다. 지난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삼성이 최순실씨 측에 제공한 말 3마리는 뇌물’ ‘경영권 승계 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구체적으로 판단한 만큼 형량 다툼에만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항소심과 같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내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삼성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에서 확보된 자료를 증거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승계작업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의 동기이자 배경”이라며 “승계작업의 존재 여부와 박 전 대통령의 우호적 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증거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양측 의견을 들은 재판부는 공판을 마치기 전 이례적인 당부를 전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삼성그룹 총수와 최고위직 임원들이 계획하고 가담한 횡령 및 뇌물 범죄”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효과적인 기업 준법감시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사건은 대기업 집단, 재벌 총수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저지른 범죄”라며 “국내외 각종 도전이 엄중한 시기에 총수가 재벌 체제 폐해를 시정하고 혁신경제로 나아가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을 향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총수로서 어떤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통감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본 심리에 임해주길 바란다”며 “심리기간 중에도 당당하게 기업 총수로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시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이 부회장은 “이재용 피고인에게 당부드린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재판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이 부회장은 법정으로 들어가기 전 취재진 앞에서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뇌물인정 액수가 올라가면 형량이 바뀔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 추가 질문이 이어졌지만 대답은 없었다. 재판이 끝난 후 심경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