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초반 광통교 서화사에 한정됐던 그림가게가 독점적인 시전 체제의 붕괴 이후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림 가게는 서서히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판매 공간의 유형도 서화포書畵鋪, 지전紙廛(지물상), 서점 등으로 다양해진다.
풍속화 혹은 고려자기에 대한 서양인의 수요는 구매 의사가 확실하고 지불 능력이 높은 것에 반해 시장의 크기가 작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와달리, 그림이 물리적 공간을 갖춘 가게에서 거래될 수 있었던 것은 신흥 부유층이 형성되면서 내국인의 수요의 저변이 확대되어 시장 크기가 커진 데서 연유한다. 수요가 광범위해지면서 유통 상인에 의해 중개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그림 판매는 서화를 부수적으로 취급하는 형태였다. ‘정두환품지상’이 1890년대 지점紙店이란 형태로 점포를 운영하다가 1900년부터 ‘서화포’로 이름을 바꾸고 종이와 서화를 함께 취급한 것이 그런 예이다.
이보다 좀 뒤의 일이지만, 《황성신문》 1910년 8월 19일 자 김성환 지물포 광고에서도 종이류와 함께 ‘도화圖畫 각종’을 판매한다고 하였는데, 종이를 취급하는 지물포에서 도화를 함께 판매하는 것이 당시 유행했던 판매 형태로 보인다.
아직 서화시장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더라도 지전, 포목점, 서점 등에서 서화를 팔았다는 사실은 불특정 수요자를 대상으로 기성품의 판매가 이뤄진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지전에서의 그림 판매는 장승업이 서울 당주동(신문로) 부근인 야주개의 지전에 고용되어 민화를 그려주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시정의 수요에 보다 구체적으로 대응하려는 상인들의 이익 동기가 강하게 작용했다.
특히 장승업이 고용됐던 지전의 위치가 신문로 부근인 야주개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광통교 인근 시전 행랑에 자리 잡았던 지전의 위치와는 거리가 있다. 전통적인 시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지역에 지전이 생겨났던 것이다. 중국 등으로부터 값싼 종이가 수입되어 다양한 종이의 판매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지전은 각광 받는 사업 품목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도 당시의 서화 수요에 부응해 민화 등을 사전 제작해 팔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지전에서 고용되는 화가는 무명의 직업화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문이 많아지면 스스로 독립해 화방을 차려 주문을 받아 수요를 소화했다. 야주개의 지전에 고용되어 민화를 그렸던 장승업도 유명해지자 독립해서 1890년대 광통교 일대 자신의 ‘육교화방六橋畵舫’을 차렸다. 그러고는 양반가나 부유층의 주문 그림을 제작했다. 이때는 지전에 고용된 형태가 아니라 스스로 차린 화방이라는 점에서 화가 스스로 중개상의 역할을 겸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출현을 예고한다.
대한제국의 개혁정책 여파로 생겨난 서점에서도 책과 함께 서화를 판매했다. 서점은 1896년 《독립신문》 창간호에 광고를 낸 ‘대동서시大同書市’를 효시로 갑오개혁(1894)을 전후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다. 1897년 ‘고제홍서사高濟弘書肆’가 두 번째로 대한제국 시대에 개점했는데, 1902년대 초기까지는 민족계 출판서적상으로는 가장 큰 출판사였다. 이 서점은 1907년 출판을 겸한 서적상으로 확장한 후 회동서관으로 개칭된다. 1900년 ‘김상만책사金相萬冊肆’가 신문광고에 등장해 1907년 광학서포廣學書舖로 개칭한다. ‘박문서관博文書館’은 1907년 노익형盧益亨이 서울 상동 예배당 앞에 가게를 내 세운 출판사이며, 1908년 김용준이 서울 소안동에 ‘보급서관普及書館’을, 1908년 남궁억이 ‘유일서관唯一書館’을 설립했다.
이 시기 서점이 대거 등장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우선 고종 시대의 자주외교 부국강병 정책과 관련이 있다. 소학교 중학교와 함께 관립 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 농상공학교, 의학교 등 전문 교육기관이 대한제국기에 생겨났다.
지전, 서점 등에서 파는 그림은 가격이 비싸지 않은 대중적인 수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장수와 건강을 바라는 길상의 의미를 담은 도석인물화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벽사적인 목적으로 사려는 것으로, 기성품으로 다량 제작이 가능한 도식화된 그림이 주종을 이루었다. 가격은 몇 전에 불과할 정도여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1900년대 초 서양인의 눈에 비친 어느 가정집 풍경을 보자. 마루에 가장이 일을 보고 있고 안방에 아이와 엄마가 마주보며 노는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 집 마루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방문 위쪽에 가로로 긴 민화가 걸려 있다.
지전이나 서화포에서 장지문에 붙인 그런 민화들을 사왔을 것이다. 거기서 팔리는 그림의 종류, 그 화려한 색감이 신기했는지 조선을 찾은 외국인도 이에 대해 묘사하기 했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를 지낸 로제티Carlo Rosetti는 당시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한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1904)라는 책을 남겼다. 여기에서 그는 지전에서 서화를 판매하는 광경을 묘사하면서 판매되는 그림의 종류와 함께 가격을 몇 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복제화와 종이를 파는 상인들이 모여 있다. 몇 전만 주면, 용이나 호랑이, 날개 돋친 말, 옛 전사들의 환상적인 형상을 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문짝에 붙여놓으면 집에서 악귀를 내쫓는다고 한다. 이들 복제화 중에는 옛 신화에 등장하는 성현들과 수호신을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방에만 사용하며 한국의 어느 집에나 같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싸구려 그림으로라도 집안을 꾸미고, 그 안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소망까지 담아내고자 했던 당시의 서민들. 미술시장의 발전에는 이런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