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신고 여학생 ‘보복 화형’한 일당, 전원 사형 선고

입력 2019-10-25 15:04 수정 2019-10-25 17:37
누스랏 자한 라피 살해 사건에 분노한 방글라데시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BBC

교장으로부터 성추행 당한 일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19세 여학생의 몸에 불을 질러 숨지게 만든 16명 전원에게 방글라데시 법원이 사형을 선고했다. 16명 중에는 성추행을 저지른 교장을 비롯해 교사 2명, 지역 정치인 2명이 포함됐다. 이들과 유착관계에 있는 현지 경찰의 수사 축소·은폐 시도도 드러났다. 한 여성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벌어진 지역사회 유력자들의 추악한 공모가 방글라데시 사회의 공분을 이끌었다.

영국 BBC방송은 24일(현지시간) “성범죄 관련 재판의 경우 결과가 나오는 데 수년이 걸리기 일쑤인 방글라데시 사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재판만은 아주 예외적으로 신속히 진행돼 반년만에 결론이 내려졌다”고 보도했다. 잔혹한 살해 사건에 대한 정의 구현을 촉구하는 시위가 방글라데시 전역에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건을 담당한 하페즈 아메드 검사는 “방글라데시에서 그 누구도 살인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의 희생자인 누스랏 자한 라피는 방글라데시의 작은 도시 페니에서 이슬람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는 지난 3월 교장실로 불려가 교장인 시라지 우드 둘라에게 수차례 성추행을 당했다. 성범죄를 당한 여성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방글라데시 사회 분위기 탓에 많은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지만, 누스랏은 용기를 내 가족들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설명했고 가족의 지지 아래 교장을 경찰에 고소했다.

누스랏과 그의 가족들의 용기에 교장이 경찰에 체포됐지만 그 직후 피해자를 겨냥한 보복성 범죄가 시작됐다. 고소를 취하하라는 학교 동급생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의 협박이 이어졌고 누스랏은 이를 거부했다.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경찰도 공개된 장소에서 누스랏의 진술을 받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저질렀다. 한 경관은 휴대전화 카메라로 누스랏을 촬영해 이를 현지 언론에 유출하기까지 했다.

교장을 고소한 지 11일 만인 지난 4월 6일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를 찾은 누스랏은 친구가 옥상에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다는 거짓말에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교장의 살해 사주를 받은 4~5명의 일당이었다. 부르카를 뒤집어쓴 이들은 누스랏에게 또다시 고소 취하를 협박했고, 그가 거부하자 그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가까스로 현장을 탈출했지만 누스랏 몸의 80%가 이미 화상을 입은 상태라 회생은 어려웠다.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누스랏은 ‘교장이 내 몸을 만졌다. 내 마지막 순간까지 이 범죄에 맞설 것이다’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영상 메시지를 친오빠에게 보낸 뒤 의식을 잃었고 나흘뒤 끝내 병원에서 숨졌다.

비극은 누스랏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살인을 분신자살로 위장하려 했고, 지역 경찰들은 이에 보조를 맞춰 살해 현장을 훼손하기도 했다. 몇몇 경찰관들은 가해자들과 적극 협력해 누스랏이 자살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사건의 배후에 교장을 비호하려는 여당 소속 지역 정치인 2명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방글라데시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까지 나서 “그 어떤 범인도 법적 조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BBC는 “하시나 총리의 공개 발언 이후 수사 양상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피고인들의 변호사 측은 항소를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인권단체들은 “성범죄 신고 자체가 보복 위험을 수반하는 사회에서 누스랏 같은 용기있는 사례는 여전히 흔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성범죄 피해자들이 되려 지역사회에서 직간접적 괴롭힘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심지어 폭력적 공격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