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신고 후 살해된 소녀, 방글라데시 여성의 비극 드러내

입력 2019-10-26 00:10
누스라트 자한 라피(19). bbc 캡쳐

방글라데시 법원이 소녀의 몸에 불을 질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된 1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BBC가 25일 보도했다. 이 소녀는 성희롱·성추행 혐의로 학교 교장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참변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은 지난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누스라트 자한 라피(19)는 집무실에 자신을 불러서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일삼은 교장을 3월 26일 경찰에 신고했다. 교장은 체포됐다.

하지만 불행은 누스라트에게 닥쳐왔다. 학교 친구가 4월 6일 “친구 한 명이 얻어맞고 있다”며 누스라트를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거짓말이었다. 누스라트는 친구를 만나기는커녕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5명에게 둘러싸였다. 이들은 누스라트에게 “신고를 취소하라”고 압박했다.

누스라트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은 누스라트에게 불을 질렀다. 누스라트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신체의 80%가 화상을 입고 말았다. 현지 경찰은 “불을 지른 학생들은 누스라트가 자살한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고 전했다.

누스라트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오빠의 휴대전화에 “교장이 나를 만졌다. 나는 내 숨이 끝날 때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동영상을 남겼다. 그녀는 이 동영상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학교 친구들의 이름도 거론했다. 하지만 누스라트는 끝내 화상을 이기지 못하고 4일 만에 사망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난 4월 누스라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하고 있다. bbc 캡쳐

이 사건이 알려지자 방글라데시 사회는 경악했다. 경악은 분노로 가득 찬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누스라트가 겪은 고통에 분노하고,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성범죄에 목소리를 높였다.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는 공개적으로 “이번 사건의 범인들은 법적 조치를 절대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수사와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경찰은 5월 살인 혐의로 16명을 체포했다. 법원은 5개월 만에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6명 중 12명이 “라피를 학교 옥상으로 유인하고 불을 지르는 데 관여했다”고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방글라데시 법원이 유사한 사건을 판결하는 데 일반적으로 몇 년이 걸린다”고 전했다.

방글라데시 법원이 누스라트의 죽음과 관련된 피고인 1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피고인들이 호송차에 타고 있다. BBC 캡쳐

수사 결과 지역사회가 조직적으로 누스라트를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한 사실이 드러났다. 성희롱·성추행 혐의로 체포된 교장은 학교 학생들에게 누스라트 살해를 명령했다. 지역 경찰들은 다른 피고인들과 협력해 “누스라트가 자살했다”는 허위정보를 유포했다. 또 다른 피고인 두 명인 루훌 아민과 막수드 알람은 집권당의 지역 지도자들이다.

누스라트가 조사 과정에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담당 경찰관은 누스라트의 진술 동영상을 자신의 휴대폰에 남겼다. 심지어 경찰관은 얼굴을 가리려는 누스라트에게 “별일 아니다”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누스라트 어머니 시린 아크타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법원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접한 시린 아크타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딸을 한순간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딸이 겪은 고통을 똑같이 느끼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BBC는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일부 피고인들은 울었고, 또 다른 피고인들은 ‘정의가 사라졌다’고 외쳤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서 정의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스라트 같은 여성들이다”라고 지적했다.

자선단체 ‘ActionAid’가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80%가 직장 내 성폭력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 또 여성인권단체 ‘Mahila Parishad’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19년 1월부터 6월까지 여성 592명이 성폭행을 당했고, 여성 113명이 집단강간을 당했으며, 여성 26명이 성폭행을 당해 숨졌다”고 밝혔다.

박준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