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도국’ 지위 포기… “유지 명분 없어, 농업경쟁력 강화”

입력 2019-10-25 11:15 수정 2019-10-25 11:24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사진 가운데)이 2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정부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 결정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대외경제장관회의 열고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
韓 국제적 위상 높아져 특혜 유지 불가 판단
‘공익형 직불제’ 적극 추진 등 국내 농업 경쟁력 높여 대응


정부가 25일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향후 협상이 이뤄질 경우 그동안 받아왔던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1995년 WTO 자유무역 틀이 갖춰진 지 25년 만의 일이다.

정부는 그동안 국내 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 따라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더이상 버틸 ‘명분’이 없다는 판단이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국제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개도국 지위를 언제까지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정부는 개도국 특혜를 받지 않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국내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체질을 개선한다는 계획이다. 향후 공익형 직불금 예산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차기 농업을 이끌 청년·후계농을 육성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부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고 “미래 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한 셈이다. 다만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홍 부총리는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닌 미래 협상에 한해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국제적 위상 향상에 개도국 유지할 명분 약해져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 배경에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우리나라가 1995년 WTO에 가입하며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을 때와 비교해 경제 규모가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홍 부총리는 “WTO 가입 후 25년이 지난 현재 한국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12위, 수출액은 세계 6위,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하는 등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오를 정도로 발전했다. WTO 164개 회원국 중 주요 20개국(G20)이면서 OECD 회원국,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을 모두 충족하는 국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세계 9개국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대외적인 위상이 높아진 만큼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주장할 명분이 약해진 것이다.

한국에 개도국 특혜를 주는 것은 과도하다는 국제사회의 문제 제기도 영향을 미쳤다. 홍 부총리는 “경제규모나 국제적 위상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낮은 싱가포르, 브라질, 대만 등 다수 국가들도 향후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향후 WTO 협상에서 한국에 개도국 혜택을 인정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결정이 늦어질수록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고 진단했다.


단기적 영향은 없을 듯…농업 경쟁력 강화 여부가 관건
정부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단기적으로 국내 농업에 미치는 피해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현재 체결된 협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차기 협상부터 적용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개도국 혜택을 없애려면 다자간 협상이 먼저 타결돼야 한다.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2008년 이후 유명무실해지면서 DDA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다. 차기 협상이 열릴지도 불투명하다. 홍 부총리는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기존 협상을 통해 이미 확보한 특혜는 변동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미래 협상으로 미칠 영향에 대비할 시간과 여력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차기 협상으로 개도국 특혜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기간을 국내 농업 경쟁력을 제고할 ‘골든타임’으로 삼겠다는 방침이다. 쌀 등 국내 농업의 민감분야를 최대한 보호하되 농업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특혜를 받지 않고도 살아남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전략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농업인 소득 안정 및 경영 안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공익형 직불제’다. 친환경 농업 등을 할 때 보상금 형태로 직불금을 주는 식이다.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으면 현행처럼 고율 관세로 쌀 등 일부 농산물 수입에 장벽을 쌓지 못해 농민들의 수입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직불금 같은 보조금도 줄 수 없다. 공익형 직불제는 WTO에서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정부는 내년 공익형 직불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2조2000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다. 올해 1조4000억원이었던 데 비해 큰 폭으로 늘어난 셈이다. 홍 부총리는 “국회 심의 과정에 성실히 임하겠다. 향후에도 직불금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 농업이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체질을 개선할 수 있도록 ‘젊은 인력’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최대 3년 동안 월 80만~1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청년영농정착지원금’ 제도를 적극 추진하고, 향후 사업 성과를 내면 규모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또 국내 농산물 수급조절 기능을 강화해 농산물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관리한다.

홍 부총리는 “농업경쟁력 향상을 위한 재정 확보에 만전을 기하겠다. 농업계·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며 추가 대책을 마련하겠다. ‘농업시장 개방에 따른 피해 보전’이라는 정책 기조를 ‘우리 농업의 미래를 위한 투자’로 바꿔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