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보호 못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

입력 2019-10-25 04:00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24일 국회 앞에서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시행 1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택배 노동자 A씨는 매일 100명이 넘는 고객을 만난다. 배송된 물건에 작은 흠이라도 있는 경우 A씨 잘못이 있든 없든 고객의 날선 불만에 직면해야 한다. 명절에 물량이 밀려 배송이 늦어지면 핸드폰으로 욕설 문자가 날아든다. “저러니 택배나 배달하지” 같은 모욕도 종종 당한다. A씨는 “하루하루 고객들을 대하며 마음에 병이 생겼다. 낯선 번호로 전화만 와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고 토로했다.

올해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에 나온 A씨의 사례는 감정노동자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들이다. 지난해 10월 18일부터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됐지만 여전히 A씨와 같은 감정노동자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감정노동자들은 아직도 고객의 폭력과 폭언에 노출돼있다”며 “고용노동부가 철저히 감독해 법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지난달 병원과 콜센터, 백화점 등에서 일하고 있는 감정노동자 2765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이날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의 83.4%는 공격적이거나 까다로운 고객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노동자 열 명 중 여섯 명은 “고객을 대할 때 나의 감정이 상품처럼 느껴진다” “퇴근 후에도 힘들었던 감정이 남아있다”고 답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에 알맞은 교육과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신명숙 다산콜센터 지부장은 “작업 현장에서 악성 민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상세히 교육받지 못했다”며 “왜 참지 않고 전화를 끊었냐고 할까 두려워 민원인의 욕설과 비속어를 2~30분씩 듣고 있다”고 말했다.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62%, 남성의 57%는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상태였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실시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법의 존재도 잘 모르는 노동자가 절반 이상(52.2%) 이었다. 이성종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법은 만들어졌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기업이나 사업주의 무관심과 방치가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고용노동부가 적극적으로 감독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감정노동자의 피할 권리 보장하라!” “사업주의 법 미이행 시 처벌 조항 강화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위원장은 “이번 조사 결과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해 대책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