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터키가 미군이 떠난 시리아 북동부 지역을 공동으로 차지했다. 주요 외신은 미국이 지정학적 경쟁의 ‘최대 패배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냉전 종식 후 30년간 유지됐던 미국 일극의 세계질서가 ‘이익이 없는 곳에는 개입도 없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신고립주의’와 함께 저물어가는 모습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터키 접경 시리아 내 설치한 ‘안전 지대’에서 쿠르드 민병대 완전 퇴각한 뒤 러시아·터키 양국 군대가 해당 지역에서 공동 순찰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양해각서에는 “쿠르드 독립 세력 부대와 군사 조직은 23일 정오부터 150시간 내에 시리아·터키 국경으로부터 30㎞ 이상 떨어진 외곽 지역으로 철수를 마무리해야 한다”며 “이 순간부터 카시밀리를 제외한 터키의 ‘평화의 샘’ 작전(시리아 내 군사작전) 지역 동서 방향 10㎞ 구간에서 러시아·터키의 합동 순찰이 시작될 것”이라고 명시됐다.
이에 따라 터키와 쿠르드족의 휴전이 이날로 종료됐지만 확전 가능성은 낮아졌다. 터키 국방부는 “현 단계에서는 새로운 군사작전을 벌일 필요성이 더 이상 없다”고 발표했다. 양국은 합의 이행을 감독하고 검증할 공동기구도 꾸릴 예정이다.
미 CNN방송은 “시리아 내 미군의 발빠른 철수는 푸틴 대통령에게 큰 선물이 됐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감행하자마자 중재자를 자처하며 빠르게 빈 자리를 메꿨다. 터키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을 공격하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서로 적대하던 친러 성향의 시리아 정권과 쿠르드족을 손 잡게 만들어 터키에 공동 대응하도록 이끌었다. 최근에는 터키와의 대화를 주도하며 시리아 북부 지역에 대한 양국 공동 관리 합의를 이뤘다. 러시아로선 이슬람 극단주의세력 ‘이슬람국가’(IS)의 상징적 수도 락까 등 시리아 북부 요충지에 총 한발 쏘지 않고 무혈 입성한 셈이다.
터키 역시 미국의 시리아 철군 사태의 승리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시리아 국경에서 쿠르드 민병대를 몰아내고 자국내 쿠르드족 자치세력의 독립 열망을 분쇄하겠다는 목표를 성취했다. 터키군은 라스알아인, 타아브야드, 술루크 등 시리아 북부 국경지역 요충지도 장악했다.
미국의 적들로 간주되는 세력의 중동 영향력도 강화될 전망이다. 러시아를 등에 업은 바샤르 알 아사드 독재 정권은 시리아 국토의 3분의 1에 달하는 쿠르드족 장악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의 중동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러시아와 우호 관계에 있는 이란의 중동 내 입지도 더욱 강화될 수 있다. 핵개발 문제로 이란과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의 황급한 철군 결정은 IS 격퇴전 등으로 5년간 미국이 시리아에서 어렵게 구축한 영향력을 스스로 내버리는 행보다. CNN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철군 결정 과정에서 자국의 제임스 제프리 ‘시리아·반(反) IS 동맹’ 특사와 어떠한 상의도 거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심사숙고를 거치지 않은 즉흥적 결정이라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9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보낸 크루드 공격 만류 서한이 터키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는 보도도 이날 터키 외무장관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중동의 역학 구도에서 미국이 처한 위상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