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를 촉발한 살인범이 홍콩과 대만 정부가 자신의 신병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결국 석방됐다. 그가 살인죄로 처벌받을 가능성도 불투명해졌다. 홍콩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캐리 람 행정장관에게 책임을 물어 교체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됐다.
23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대만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한 찬퉁카이(20)가 이날 오전 홍콩 픽욱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찬퉁카이는 취재진 앞에서 허리숙여 사죄의 뜻을 표한 뒤 “피해자의 가족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대만으로 가서 죄값을 치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홍콩 사회와 홍콩인에게도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으며, 홍콩인들이 속죄할 기회를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찬퉁카이는 지난해 2월 대만에서 임신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대만의 한 지하철역 부근에 유기한 후 홍콩으로 도망쳤다.
홍콩은 ‘속지주의’여서 영외에서 발생한 범죄는 처벌할 수 없다. 홍콩은 찬퉁카이에게 여자친구의 돈을 훔쳤다는 절도와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만 적용해 기소했고, 그에게는 29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그는 모범수로 형 감면을 받아 18개월만 복역하고 이날 출소했다.
찬퉁카이는 최근 홍콩 정부에 서한을 보내 대만에서 살인죄에 대한 복역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홍콩 정부는 그의 뜻에 따라 대만에 찬퉁카이 신병 인수를 요청했지만, 대만 당국은 ‘정치적 조작’이라며 공식 사법 협조가 이뤄지지 않으면 인수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그런데 대만 정부는 태도를 바꿔 지난 22일 “우리 경찰을 홍콩으로 보내 찬퉁카이를 데려가겠다”고 밝혔지만 이번에는 홍콩 정부가 “홍콩의 사법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양측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살인범이 처벌받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게 된 것이다.
찬퉁카이의 범죄는 송환법 반대 시위를 촉발하는 뇌관이 됐다. 홍콩 정부는 중국을 포함해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인도조약 미체결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 인도가 가능하도록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홍콩 야당과 시민단체는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수 있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송환법 반대 시위는 지난 6월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결국 송환법 반대 시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내년 3월 교체할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람 장관이 독단적으로 송환법을 추진하다 혼란을 자초했고, 무리하게 복면금지법을 발동시켜 시위를 더욱 격화시키는 등 부실한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는 게 중국 지도부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다만 중국 지도부는 람 장관을 곧바로 경질하면 시위대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수 있어 내년 3월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람 장관 대신에 새로운 행정장관을 인준하는 식으로 교체할 것이라고 FT는 전했다. 람 장관의 원래 임기는 2022년까지다
람 장관 후임으로는 헨리 탕 전 재무장관과 노먼 찬 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장이 거론된다. 재벌 2세인 탕 전 재무장관은 2012년 홍콩 행정장관에 도전했으나 자택에 지하실을 불법으로 지은 사실이 드러나 중도하차했다.
노먼 찬 전 위원장은 1990년대에 금융통화위원회를 창설하고 홍콩달러를 US달러에 연동시키는 페그제를 도입해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 그는 2009년 금융통화위원장으로 임명돼 올해 9월 퇴임때까지 홍콩의 중앙은행장 역할을 해왔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