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정부, ‘왓츠앱 혁명’에 화들짝 “대통령 월급 50% 삭감”

입력 2019-10-21 17:24
20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시내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국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레바논 주요 도시에서는 반정부·반부패 시위가 지난 17일 이후 나흘째 이어졌다. AP연합뉴스

레바논에서 2011년 민주화운동 ‘아랍의 봄’ 이후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일 울려 퍼지고 있다. 단초는 ‘왓츠앱’ 등 메시지 어플리케이션에 대한 과세였다. 하루 20센트, 한 달 6달러에 불과한 세금이었지만, 그간 정치권의 부정부패로 쌓인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수십만명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정부는 서둘러 과세를 철회했지만 시위대는 오히려 세를 불리고 있다. 결국 개혁안 마련을 약속했지만 이조차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레바논 시위대 수십만명이 20일(현지시간) 정부 총내각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나흘째 이어가 수도 베이루트와 제2 도시 트리폴리 등 주요 도시가 마비됐다고 AFP,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날 시위대는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타이어를 불 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이어갔다. 국기를 흔들며 2011년 민주화운동 당시 구호 “국민은 정권 퇴진을 요구한다”를 외치기도 했다.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등 레바논 전역으로 퍼져가며 시위가 격해지자, 학교나 은행 등도 문을 닫았다. 전국에 배치된 육군과 보안군은 대통령궁으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이번 시위는 이른바 ‘왓츠앱 과세’로 촉발됐다. 레바논 정부는 지난 17일 내년부터 왓츠앱·페이스타임 등 메시지 어플리케이션 이용자에게 사용에 따른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20센트, 한 달 6달러의 세금에 불과하지만 그간 정치 불안정과 경기침체로 누적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정부는 서둘러 과세를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 기회를 통해 만연한 부패와 경제난 타개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수십년간 자신들의 지위를 악용해 배를 불려온 반면, 국민들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레바논은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서 180개국 중 138위에 불과했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150%에 달하는 860억달러(약 101조원) 상당의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0.2%에 불과할 정도로 국내 정치 불안정으로 인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베이루트에 사는 인테리어 건축가 셰린 샤와(32)는 로이터에 “정치가들이 역겨워서 이곳에 왔다.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이건 국가가 아니다”라며 “월급은 적고 물가는 매우 높다. 요즘은 일자리조차 없다”고 울분을 쏟아냈다. 40대 여성 하난 타코체는 “우리는 지도자들에게 ‘떠나라’고 말하러 왔다”며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사기꾼이고 도둑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시위가 변화를 가져오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사드 알 하리리 레바논 총리는 21일 연정 파트너들과 함께 정부 개혁안 패키지를 마련하기 위해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셸 아운 대통령이 이 개혁안에 대한 회의를 주재할 예정이다. 이 개혁안에는 2020년 예산안의 적자 제로(0)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 장관 등을 포함한 전·현직 공무원 봉급을 50% 삭감하고 33억달러(약 4조원) 상당 은행 기부금을 받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 새로운 규제기구를 설치해 예산 투명성을 높이고 개혁 진행을 감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개혁안으로 시위대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목소리가 많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