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합의안이 표결에도 부쳐지지 못한 채 하원에서 좌절됐다. 하원이 영국 내부에서 브렉시트 이행 관련 법률이 모두 정비될 때까지 존슨 총리의 합의안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도록 하는 수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오는 31일로 예정됐던 브렉시트 시한이 또다시 연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영국 하원은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이후 37년만에 극히 이례적으로 토요일날 문을 열었다. 존슨 총리가 유럽연합(EU)와 체결한 새 브렉시트 합의안을 표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보수당 출신 무소속 의원인 올리버 레트윈 경의 발의안에 국민투표로 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3년4개월만에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브렉시트를 완수한 총리로 남길 바랐던 존슨 총리의 야심은 하원의 문턱에서 물거품이 됐다.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합의안에 제동을 건 것은 전임 테레사 메이 총리 시절 3차례 부결을 포함해 이번이 네번째다.
존슨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 직전 진행된 레트윈 경의 수정안은 범야권의 지지 하에 찬성 322표, 반대 306표 16표차로 가결됐다. ‘레트윈 수정안’은 브렉시트 이행 법률이 최종적으로 영 의회를 통과할 때까지 ‘존슨 합의안’에 대한 의회 판단을 뒤로 미루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존슨 합의안이 예정됐던 승인 투표에서 가결됐더라도 이행 법률 제정 등 후속 절차를 완료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존슨 합의안을 지지했던 일부 의원들이 마음을 바꿔 이행 법률에 반대표를 던져 브렉시트 예정일인 31일까지 관련 절차를 마치지 못할 경우 의도치 않은 ‘노 딜(합의 없는) 브렉시트’가 발생할 수 있다. 레트윈 수정안은 결국 노 딜 브렉시트를 방지하기 위한 보험의 성격이 짙다.
이 수정안은 단순히 존슨 총리가 합의안 승인 투표를 철회하도록 하는 것을 넘어 그에게 이중의 굴욕을 안겼다. 영국 하원은 지난달 EU 정상회의 마지막 날까지 EU와 브렉시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거나, 의회에서 노 딜 브렉시트에 대한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 존슨 총리가 직접 EU 측에 브렉시트 3개월 추가 연기 요청 서한을 보내도록 하는 ‘노 딜 방지법’을 마련해뒀는데 이날이 그 마감시한이었다.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하느니 시궁창에 빠져 죽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존슨 총리는 노 딜 방지법에 따라 EU에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다만 존슨 총리는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브렉시트 연기 요청 서한과 함께 ‘브렉시트 연기는 실수’라고 주장하는 별도 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BBC와 가디언 등은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연기 요청 서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브렉시트 연기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에만 자필로 서명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투스크 의장을 포함한 EU 지도자들과의 통화에서도 “그 편지는 의회의 편지지 나의 편지가 아니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존슨 내각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 이행 법률을 신속히 마련해 다음주쯤 다시 의회 표결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연정 파트너인 북아일랜드민주연합당이 여전히 존슨 합의안에 반기를 들고 있어 통과가 불투명하다. 강경 브레시트 진영을 이끌고 있는 나이젤 패라지 브렉시트당 대표조차 “존슨의 합의안은 메이와 95% 같다”며 반발하고 있다.
AP통신은 EU는 노 딜 브렉시트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브렉시트 추가 연기를 승인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존슨 합의안이 하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브렉시트 시한이 내년 1월로 연기될 경우 그간의 혼란이 똑같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