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 흔적 지우기가 확산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주요 발생지인 광주와 전남·북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전씨의 필체가 담긴 현판 등의 철거 움직임이 잇따른다.
전북 장수군은 “김순홍 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 회장 등이 장영수 군수와 면담한 자리에서 전씨가 쓴 논개 생가 부근 정자 현판과 표지석의 철거를 공식 요청했다”고 18일 밝혔다.
주논개(朱論介 1574년~1593년)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해 숨진 조선시대 열녀다.
선양회는 전날 군수실을 찾아 전씨가 직접 쓴 장계면 정자 현판과 표지석이 논개 성역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전씨와 충절의 대명사인 논개와의 연관성도 없어 왜군을 서늘케 한 논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는 현판과 표지석을 철거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군은 여론수렴을 거쳐 철거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전씨의 흔적이 남은 현판과 비석을 철거한 후 논개 정신을 담은 새 현판을 제작할 방침이다.
장 군수는 “선양회의 올바른 역사관과 판단을 존중한다”며 적극적 협조를 약속했다.
장계면 대곡리 논개 생가 부근 정자의 ‘단아정’ 현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1999년 10월 쓴 것이다.
정자 앞 표지석에는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생가를 복원하고 정자에 ‘단아정’이란 친필을 남겨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으니 그 얼이 높고 선양되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시민단체와 일부 군민들은 그동안 “군부 독재자가 쓴 치욕적인 현판 글과 표지석”이라며 서명 운동을 통해 철거를 촉구해 왔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올 들어 청와대 국민청원과 국무총리실에 접수한 민원에 대한 회신을 통해서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현충문 한판의 글씨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한 전두환씨가 쓴 글씨로 대전 현충원 정문 현판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지난 8월 말 “현판의 역사성과 국민정서, 사회적 공감대 및 유사사례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교체여부를 검토한다”는 원론적 답변을 내놨다.
현충원의 긍정적 답변에 따라 호국영령들이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문에 걸린 전두환 친필 현판이 34년 만에 내려질 공산이 커졌다.
대전현충원은 전씨가 대통령이던 1985년 준공됐으며 전씨는 직접 친필을 써서 정문격인 현충문 현판으로 걸었다.
보훈처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방침을 결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직까지 현판 철거 등에 대해 확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전두환 집권 말기인 1987년 완공된 경기 포천시 국도 43호선의 ‘호국로’라는 한자 기념비도 철거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역시 전씨가 쓴 한자 기념비 하단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등의 찬양문구가 새겨져 있다.
시민단체들은 “민주주의의 수치로 부끄러운 기록”이라며 기념비를 흰색 천으로 가린 뒤 지자체에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1일 실시된 국회 국방위 육군본부 국정감사에서는 소위 ‘전두환 범종’이 도마에 올랐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전남 장성 상무대 군 법당에 설치된 전두환 범종을 조속히 철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군 장교 양성의 요람인 상무대에 전씨와 5·18민주화운동에 투입된 계엄군의 전승 기념물이 설치돼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연내 철거를 촉구했다.
상무대 범종은 1981년 5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광주 상무대를 방문하면서 설치된 것이다.
상무대의 장성 이전으로 함께 옮겨진 범종에는 ‘상무대 호국의 종 대통령 전두환 각하’라고 새겨져 있다.
광주시와 5월 단체들은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담양 11공수여단 정문 앞에 세워진 부대준공 기념석(전두환 기념석)을 철거해 지난 5월 5·18기념공원으로 옮겼다.
기념석은 폐기처리 하지 않는 대신 글자가 거꾸로 보이도록 위아래를 반대로 설치해 청소년들에 대한 5·18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뒤집혀진 기념석은 시민들이 자유스럽게 밟아도 된다. 당시 시민들의 평화스런 시위를 총칼과 군홧발로 무자비하게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표현하는 공간인 것이다.
당초 강원도 화천에 주둔하던 11공수여단은 5·18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가 1982년 전남 담양으로 부대를 옮기면서 이른바 전두환 기념석을 세웠다.
가로 약 2m, 세로 약 1.5m 크기 기념석에는 ‘선진조국의 선봉 대통령 전두환’이라는 글씨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된 전씨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모두 박탈됐으며 2006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훈장 등 서훈 경력도 취소됐다.
광주 시민단체 관계자는 “전씨는 1980년 그날 이후 4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억울하게 희생된 광주시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다”며 “민족사에 비극을 남긴 전씨 흔적 지우기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