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민프레싱?’ 예상보다 강했던 북한과 고전한 한국

입력 2019-10-17 19:21 수정 2019-10-17 22:14
공을 쳐 내고 있는 김승규. 왼쪽은 북한 공격수 정일관(11번). 대한축구협회 제공

북한의 플레이는 거칠었다. 하지만 단순히 거칠어서 비긴 건 아니었다. 국제축구연맹(FIFA)랭킹 37위의 강팀 한국을 상대로 북한(113위)은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의 ‘게겐프레싱’을 떠올리게 하는 강도 높은 전방 압박으로 선전을 펼쳤다.

대한축구협회는 17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러진 북한과의 2022 카타르월드컵 2차예선 H조 3차전 전체 경기 영상을 상영했다.

90년대 초반 다이얼로 채널을 돌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봤을 것 같은 질 낮은 3:4 사이즈의 영상을 통해 선수들이 등장했다. 영상 속 선수들이 움직일 때마다 화면이 일그러질 정도로 영상은 저화질이었다. 심지어 화면상에 경기 시간도 표기되지 않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경기에 앞서 장내 아나운서가 “대한민국 국가를 틀어드립니다”라고 말했고, 김일성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모두 함께 애국가를 제창했다. 주장 손흥민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에 앞서 한 데 모여 어깨동무를 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선수들의 목소리는 텅 빈 경기장 전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휘슬이 울리고 전반전이 시작됐다. 선수들이 플레이 하나 하나에 북한 코칭스태프들은 “좋아 좋아” “야야야”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한국 선수들은 북한 선수들의 강도 높은 압박과 제스쳐에 전반 내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북한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이 수비라인에서 볼을 잡을 새도 없이 강한 전방 압박을 펼치며 빌드업을 방해했다. 북한 공격수들은 김승규 골키퍼 앞까지 넓게 포진했다. 한국 진영 측면을 수시로 파고들어 수비를 괴롭히기도 했다.

논란이 됐던 양 팀 선수들의 충돌 장면은 전반 6분 나왔다. 김진수가 드로잉 한 볼이 경합 상황에서 튀어 나오자 볼을 받는 과정에서 나상호가 북한 박명성을 뒤에서 밀쳤다. 통상적인 파울 장면이었지만 북한 선수들이 흥분해 한국 선수들과 뒤엉켰다. 그 과정에서 북한 이용철이 정우영을 두 팔로 밀기도 했다.

협회 관계자는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북한 선수가 손으로 공이 놓인 쪽으로 가던 황인범의 뺨을 때려 황인범이 심판에 어필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전반 초반 북한 리은철의 크로스가 우리 선수의 발을 맞고 골문으로 향하면서 김승규가 쳐내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왔다. 손흥민이 후방에서 올라온 패스를 받다 리용철에 걸려서 크게 넘어지는 장면은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한국은 전반 중반 이후 점유율을 높여갔다. 김문환이 수시로 오버래핑해 공격에 가담했다. 북한은 역습으로 맞섰다. 한광성이 좌측면에서 올린 크로스가 골키퍼와 수비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들었지만 쇄도하던 정일관이 발을 대지 못해 가슴 철렁했던 상황이 지나갔다.

북한은 공격시 수비라인을 거의 하프라인 근처까지 올렸다. 풀백들의 얼리 크로스도 공격 루트 중 하나였다. 수비시엔 최대 8명이 촘촘한 간격으로 두 줄 수비를 펼쳤다.

북한 장신 공격수 박광룡(11번)이 헤딩을 하기 위해 점프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의 첫 슈팅은 전반 중반에야 나왔다. 황인범이 페널티 왼쪽 바깥에서 왼발 슈팅을 날렸지만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전반 30분엔 리영직이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돌파하는 김문환에게 깊은 백태클을 날려 김문환이 쓰러지는 거친 장면이 나왔고, 정일관이 손흥민을 강하게 밀기도 했다.

북한은 전반 후반 왼쪽 측면을 돌파해 연결한 볼을 정일관이 라인을 타고 이어받아 왼발로 강력히 차 넣으면서 첫 유효슈팅을 만들어냈다. 전반전 한국의 슈팅은 1개, 북한의 슈팅은 2개(유효슈팅 1개)였을 정도로 양팀은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박광룡이 페널티 지역으로 돌파한 후 때린 슈팅이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국은 바로 반격에 나섰지만 소득을 올리진 못했다. 정일관이 후반 초반 김승규 골키퍼와의 경합 과정에서 발을 높이 드는 위험한 장면도 있었다.

벤투 감독이 귀국 인터뷰에서 밝혔던 바대로 포메이션을 4-3-3으로 바꾼 후반 한국은 주도권을 잡았다. 기회도 그 과정에서 나왔다. 후반 26분 후방에서 높이 올린 볼을 황희찬이 헤딩으로 떨궈준 것이 다시 황희찬에게 연결됐다. 황희찬은 바로 컷백을 시도했고 김문환이 강한 오른발 슈팅을 날렸다. 과정은 완벽했지만 슈팅은 골키퍼 정면으로 향했고, 결국 아쉽게 득점에 실패했다.

한국은 후반 막판까지 북한을 밀어부쳤지만 결국 골을 기록하지 못했고, 경기는 0대 0 무승부로 끝났다. 무관중과 인조잔디 그라운드 뿐 아니라 공격적으로 나선 거친 북한 선수들의 예상 외 치열했던 압박과 활동량까지. 한국은 모든 변수들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끝에 29년만의 평양 원정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