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에 눈먼 트럼프, 망가진 ‘아메리카 퍼스트’

입력 2019-10-15 07:02 수정 2019-10-15 13:1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한 달 넘게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이란·북한·시리아 문제에서 악수(惡手)를 거듭하고 있다. 건드리는 사안마다 외교 참사로 이어지면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의식, 외교 치적을 만들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다가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스타일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14일(현지시간)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슬로건인 ‘미국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프간 탈레반과의 비밀회동 전격 취소(9월 7일)

아프가니스탄 치안 병력들이 2018년 8월 12일 수도 카불 서쪽 외곽 간지 지방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AP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7일 갑작스럽게 올린 트위터 글에서 “아무도 모르게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9월) 8일 아프가니스탄 무장반군조직 탈레반 지도자들과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을 각각 만나려고 했다”면서 “그들은 오늘 밤 미국에 올 예정이었다”고 깜짝 공개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즉시 이 (캠프 데이비드) 회동을 취소하고, 평화 협상도 중단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달 5일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탈레반이 저지른 차량 폭탄 공격으로 미군 요원 1명을 포함해 10여명이 숨진 사건을 문제 삼았다.

비밀회동 취소로 미국과 탈레반이 1년 동안의 물밑협상을 통해 마련했던 아프간 미군 5000명 철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 초안도 물거품이 됐다. WP는 내년 대선 전에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보류됐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탈레반과의 협상을 발로 차지 않았다면 5000명의 미군은 당장 철수할 수 있었고, 내년 대선까지 1만 5000명의 미군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비밀협상 무산은 아프간에서 폭력 사태 격화를 낳았다. 9월 14일 미군의 지원을 받은 아프간 정부군은 최소 38명의 탈레반 조직원을 사살했다. 이틀 뒤인 16일엔 미군 요원 1명이 아프간에서 숨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9·11 테러 18주년을 사흘 앞둔 시점에 탈레반과 비밀회동을 하려고 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사우디 석유시설 피격(9월 14일)…배후인 이란에 속수무책

지난 9월 14일 드론 공격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의 석유 시설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AP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8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란과 맺었던 ‘이란 핵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일방적으로 깼다. 또 이란의 생명줄인 원유 수출을 봉쇄하는 경제 제재 조치를 가했다.

이란은 미국의 핵 합의 탈퇴 1주년이었던 올해 5월 8일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생산을 늘리겠다”고 강수를 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달 19일 “이란이 싸우길 원한다면, 그것은 이란의 공식적인 종말이 될 것”이라고 강도 높은 경고장을 날렸다. 이란의 원유 수출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을 놓고 미국과 이란의 군사충돌 우려가 고조됐다.

사건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의 석유 시설 두 곳이 9월 14일 드론 공격을 받아 가동이 중단됐다. 친(親) 이란 성향의 예멘 반군은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란을 공격 배후로 지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피격 다음 날인 9월 15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범인이 누군지 알 만한 정황이 있다”면서 “우리는 검증 결과에 따라 장전 완료된 상태”라고 강조했다. 이란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란을 공격하는 것은 중동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지는 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로 전환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9월말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중재자를 자임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로하니 대통령의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9월 24일 밤 뉴욕의 숙소였던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방에서 전화를 기다렸으나 로하니 대통령은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란 종말”, “장전 완료”를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퇴짜를 맞은 것이었다.

WP는 이란과의 문제에서 유일한 사상자는 이란과의 전쟁을 주장했다가 경질된 ‘슈퍼매파’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다고 비꼬았다.

스웨덴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또 결렬(10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지난 5일(현지시간) 열렸던 북미 실무협상에 북측 대표로 나섰던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스톡홀름 외곽 북한대사관 앞에서 “북·미 실무협상이 결렬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됐던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약 7개월 반 만에 어렵게 성사된 스톡홀름 북·미 대화도 입씨름만 하고 끝났다. 미국은 전면적 비핵화에서 크게 물러선 점진적 비핵화 합의안을 제시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북한 측 대표로 나선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미국이 빈손으로 나왔다”면서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다. 미국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져갔으며 북한 측 카운터파트들과 좋은 대화를 나눴다”고 다른 목소리를 냈다. 미국은 또 “2주 이내에 스톡홀름에서 다시 만나자”며 북한의 옷자락을 잡는 모양새를 보였다.

북핵 성과를 돌파구로 내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도 지금으로선 물 건너간 분위기라고 WP는 지적했다.

터키 대통령과 전화통화(10월 6일)…터키의 시리아 공격 묵인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 북부의 탈 아비아드에 있는 건물들이 13일(현지시간) 터키군의 공습을 받아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AP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비난받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리아 북부는 전쟁터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가졌다. 백악관은 통화 직후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추진할 것”이라며 “미군은 그 작전에 지원도, 개입도 안 할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군은 지난 9일 쿠르드족 격퇴를 위해 시리아 북동부 지역을 침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묵인이 터키군의 쿠르드족 공격에 문을 열어줬다는 거센 비난이 일었다.

터키에 맞서 시리아 정부군이 참전을 선택하면서 전투가 복잡한 양상으로 확전됐다. 게다가 미국은 터키군과 쿠르드족 사이에 끼어 있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북부 시리아 주둔하는 미군 1000여명을 철수키로 결정했다. 미군의 공백은 이 지역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서 동지로 함께 싸웠던 쿠르드족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동맹국들이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도 대형 지뢰 줄줄이 깔려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참사는 지난 한 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4월말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군부 반란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여전히 권좌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밀어붙이고 있다. 미·중은 지난 11일 ‘미니 딜’·‘스몰 딜’로 평가받는 부분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세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그가 호언장담했던 중국에 대한 승리라고 보기 힘들다고 WP는 평가했다.

WP는 그러면서도 이란와 군사적 충돌을 피하며 협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과 미국이 20년 넘게 수천억 달러를 쏟아 부으며 공을 들였던 아프간 정부에게 배신으로 비쳐질 수 있는 탈레반과의 협상 파기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WP는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미국에게 올 연말을 시한으로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한 상태다. 만약 연말까지 대북 제재 해제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북한은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

이란도 미국의 제재 해제를 이끌어내기 위해 페르시아만에서 추가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 이슬람국가(IS)도 터키의 시리아 쿠르드족 공습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시리아 동부에서 다시 발호할 수 위험이 있다.

이런 외교적 위기들은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게는 탄핵 추진만큼 위협적인 것이 아닐 수 있으나 미국의 국익에는 엄청난 손실을 가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WP는 주장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