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 화염병, 친중국 상점 습격…트럼프 “홍콩 시위 누그러졌다” 무색

입력 2019-10-13 17:40
시위대를 체포하는 홍콩 경찰.AP뉴시스

“홍콩 시위가 초기보다 많이 누그러졌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말 홍콩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홍콩 곳곳에서 친중국 성향의 상점과 점포를 부수거나, 지하철에 화염병까지 던지고 역사 입구에 불을 질렀다. 주말 시위가 19주째 이어지면서 초기보다 숫자는 줄었지만 시위대는 더욱 과격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13일 몽콕과 정관오, 취안완, 카오룽베이, 타이포 등에서는 중국 본토와 연관이 있는 상점들을 타깃으로 한 시위대의 공격이 이어졌다.

타이쿠 지역의 시티플라자 쇼핑몰에서는 검은 복장을 한 시위대가 친중국 성향의 맥심그룹이 운영하는 스타벅스의 셔터를 올리고 벽과 테이블에 스프레이로 욕설과 구호를 휘갈겼다. 카오룽베이의 텔포드 플라자에서도 시위대가 몰을 돌아다니며 차이나모바일 매장에 전시된 기기들을 부수는 등 타깃이 된 가게들을 기습 공격했다. 카오룽에 있는 중국은행 점포도 스프레이 등으로 훼손됐다.

침사추이에서는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색종이로 접은 학을 연결해 공원과 잔디밭 등에 ‘광복홍콩, 시대정신’ 등의 구호를 만들고, 부두의 난간에 수많은 종이학을 올려놓기도 했다. 사틴 지역 뉴타운 플라자에는 검은 복면을 한 채 영국 국기와 미국 성조기를 든 시위대가 눈에 띄기도 했다.

시위에 참가한 20대 여성은 “정부는 긴급법으로 시민들을 위협해 시위를 못하도록 겁을 주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쇼핑몰에서 시위를 하는 홍콩 시민들.AP뉴시스

시위대는 전날인 12일애도 검은 복장에 마스크를 쓰고 카오룽 반도의 침사추이에서 삼수이포까지 행진하며 “홍콩인들이여, 저항하라”, “마스크 착용은 범죄가 아니다”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얼굴 사진으로 만든 가면을 쓴 시위대도 있었다.

오후 3시쯤에는 카오룽 퉁 지하철역 안으로 화염병이 날아들어 역사 시설이 크게 훼손됐다. 다른 지하철 역사 입구에도 화염병으로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포착됐다. 경찰은 일부 시위대가 청사완에 있는 정부 건물에 난입해 불을 지르고 친정부 성향의 상점과 은행들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은발 행진참가자’를 자칭하는 약 200명의 노령 은퇴자들은 완차이의 경찰청사 앞에서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48시간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홍콩의 랜드마크인 사자산(Lion Rock) 정상에 ‘자유의 여인상’도 설치했다. 시위대 수십명은 해가 뜨지 않은 이날 새벽 3m 높이의 ‘자유의 여인상’을 짊어지고 사자산 정상에 옮겼다.

이 자유의 여인상은 방독면과 고글을 쓰고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홍콩 해방, 시대 혁명’이란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다. 자유의 여인상은 시위에서 경찰이 쏜 빈백(bean bag)에 맞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여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홍콩 사자산 정상의 '자유의 여인상'.로이터연합뉴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홍콩 시위에 대해 “초기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중국이 홍콩에서 대단한 진전을 이뤘다”고 말해 홍콩 시민들을 자극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류허 중국 부총리와 만난 뒤 기자들에게 “우리는 홍콩 문제를 논의했다. 나는 중국이 홍콩에서 대단한 진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류 부총리에게 ‘몇 달 전 초기에 많은 사람을 봤을 때보다 정말 많이 누그러졌다. 이제 훨씬 적은 수만 보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홍콩 상황)은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나는 이번 합의가 홍콩을 위해 대단한 것이고, 홍콩을 위해 매우 긍정적이라고 본다”고 자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지난 7일에는 중국이 반정부 시위를 인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그는 홍콩에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 국기를 흔들고 있다”면서 중국이 시위대 진압을 위해 “나쁜” 행동을 한다면 미·중 무역협상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중 무역협상이 ‘스몰딜’ 형태로 합의가 되자 중국을 치켜세우며 홍콩 시위에 대한 태도를 바꾼 셈이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