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을 향해 엄포를 놓으며 거론한 “끔찍한 사변”은 협상력을 끌어올리려는 ‘말 폭탄’에 불과할까. 전문가들은 북한이 스스로 협상 시한이라고 못 박은 올해 말까지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미 본토를 사거리에 두는 ICBM 발사는 비핵화 협상판을 완전히 걷어차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비핵화 보상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수위를 조절한 도발’을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도발 시나리오로는 여러 단계의 가능성이 언급된다. 북한은 핵실험이나 업그레이드 된 ICBM 시험발사를 재개하는 대신 이를 실시할 것 같은 움직임만 보여주는 방식으로 미국을 압박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지난해 9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유관국 전문가들 참관 하에 폐기하겠다고 약속했던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을 복구하는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노출할 가능성이 있다. 이 시설 복구는 ICBM급 미사일 시험발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동창리 발사장 복구는 내년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하는 카드로 쓰일 수 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12일(현지시간) 미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북한의 벼랑끝전술과 관련해 “미국에는 (북한이) ICBM을 또 발사할 수 있는 동창리 발사대를 완전하게 재건하느냐가 관심사항이라고 본다. (북한이) 그런 식으로 제스처를 쓸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 2월 말 이뤄진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일부를 복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용인했던 단거리미사일을 또 쏠 가능성도 있다. 지난달 10일 시험발사에서 1발이 내륙에 떨어지는 등 안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초대형 방사포’나 이스칸데르급 미사일을 개량한 단거리미사일을 다시 시험발사할 수 있다. 바지선에 설치된 수중발사대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또 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당장 군사 도발 수위를 끌어올릴 가능성은 떨어진다. 김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계산법을 받아보기 위한 실무협상을 한 번 더 시도한 뒤 여의치 않을 경우 신형 무기를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며 “다만 북한으로서도 부담스러운 핵실험이나 ICBM 발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에 대표로 참석했던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지난 7일 귀국길에 만난 기자들에게 “미국이 (협상)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그 어떤 끔찍한 사변이 차려질 수 있는지 누가 알겠느냐. 두고 보자”고 엄포를 놨다. 김 대사는 협상 결렬 당일 “ICBM 시험발사 중지 유지 여부는 미국에 달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북한이 지난 2일 신형 SLBM ‘북극성 3형’을 시험발사한 뒤 미국의 대북 정찰 활동은 강화된 상황이다. 미 공군의 지상감시정찰기 E-8C ‘조인트 스타즈(J-STARS)’ 1대는 지난 11일 수도권 상공에서 대북 감시를 위한 작전비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인트 스타즈는 북한의 이동식발사차량(TEL)과 장사정포 기지 등의 이상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