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여성들, ‘금녀 구역’ 축구경기장 38년 만에 처음 가던 날

입력 2019-10-11 12:59 수정 2019-10-11 13:01
이하 AP

지난 10일(현지시간) 이란 여성 3500여명이 축구경기장을 찾았다. 이들이 축구경기장에 입장하기까지 무려 38년이 걸렸다. 1979년 이슬람혁명을 거치고 1981년부터 이란 내 축구경기장은 금녀(禁女)의 구역이 됐다. 8만석 규모의 관중석 중 아주 작은 부분을 배정받긴 했으나 이날 여성들이 경기장에 들어갔다는 자체로 그 의미를 지닌다. 세계 주요 언론은 “이란이 여성의 경기 관람을 허용한 것은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아시아지역 2차 예선 C조 2차전에 출전한 이란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날 테헤란에 위치한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캄보디아를 상대로 14-0으로 대승을 거뒀다.


이날 경기장은 여성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38년 만에 합법적으로 축구경기장을 찾은 여성들은 감격에 젖어있었다. 한 여성은 “그동안은 처벌될 각오로 남장한 채 몰래 입장했는데 떳떳하게 들어오니 너무 기쁘고 벅차다”라며 “축구장에 들어올 수 있다니 정말 큰 일”이라고 말했다.

경기장 곳곳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성 관중은 자신들의 SNS에 역사적인 순간을 촬영해 공유하며 기쁨을 누렸다. 여성을 위한 마케팅도 넘실댔다. 경기장 주변 광고판에는 여성 위생용품이나 주방 기구 브랜드가 노출됐다. 경기 중 골을 넣은 선수는 여성 관람석을 향해 감사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란 국영방송은 여성 관중석을 먼 거리에서 촬영해 실시간 중계했다.


첫 단추 뀄으니… 한 발 더 개선돼야

처음이라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란축구협회는 남성과 여성의 구역을 분리했다. 관람석 사이에도 분리 벽을 쳤다. 여성 관객은 경기 4시간 전부터 입장하도록 했고, 출입구와 주차장도 여성 전용 구역을 마련했다. 협회 관계자는 “혹시라도 여성 관중이 불상사를 당할 수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여성은 8만석 중 할당된 3500석에만 앉을 수 있었다. 온라인 판매 1시간 만에 매진됐다. 반면 남성 구역은 텅텅 비었다. 승리가 불 보듯 뻔한 최약체 캄보디아와의 경기에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성석을 제하고 남성석 7만6500석 중 2000석 정도만 팔렸다.


아이샤(21)는 “자리가 이렇게 많이 비었는데 왜 여성 입장권을 더 늘리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불공평하다”고 강조했다. 관중석이 텅텅 비어있는데도 여성 구역이 꽉 차 입장하지 못한 여성들은 이날 경기장 앞에서 “자리는 남는데 표를 안판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더욱이 여성 관중석은 시야 제한 구역이라는 점도 불만을 표했다.

축구경기장 입장하려다 분신한 여성, 그 이후


이란 당국이 여성 관중의 입장을 허용한 데에는 지난달 벌어진 여성 축구팬의 분신 사망사건이 도화선이 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 3월 사하르 호다야리는 축구경기장을 찾았다. 그는 이란의 프로팀 에스테글날 FC 팬이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기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입장도 못했는데 그저 경기장을 찾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호다야리는 지난달 재판을 기다리다 법원 앞에서 분신했고 끝내 숨졌다.

전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대다수 언론들은 그에 대한 애도 메시지를 내보냈다. 에스테글날의 상징색이 파란색인 점에 착안해 ‘블루걸’이라는 별칭도 붙였다. 이란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거셌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이란 당국을 크게 비판했다. 이란에 대표단을 보내 “여성도 축구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라”며 “지키지 않는다면 월드컵 출전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다”고 이란축구협회를 압박했다.

이후 이번 캄보디아와의 경기에 여성 입장이 허용됐다. FIFA 관계자는 경기 전 “이 경기는 단순한 경기가 아니다”라며 “우리는 이 경기에 눈을 떼지 않을 것”라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