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본심 “쿠르드 2차대전서 미국 안 도와”…동맹 외면 나홀로 美

입력 2019-10-10 17:26 수정 2019-10-10 18:19

동맹 쿠르드를 외면하고 터키의 공격을 사실상 묵인해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을 맞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본심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표면적으로 터키의 군사적 침공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의 최근 발언 속에는 ‘쿠르드족의 일은 우리 일이 아니다’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지상군까지 동원된 터키의 침공에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자 친정인 미 공화당마저 들고 일어섰다. 내년 대선에 우크라이나 등 외세를 개입시키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탄핵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야당인 민주당과의 전선에 더해 ‘쿠르드족 사태’로 아군 진영 내에도 새로운 전선을 만들고 있는 모양새다.

“터키 쓸어버리겠다”는 트럼프, 속내는?
미 백악관이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선언한 지 사흘만에 터키군의 대대적 공격이 시작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오늘 아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터키가 시리아를 침략했다. 미국은 이번 공격을 지지하지 않으며 터키 측에 군사 행동은 나쁜 생각임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 발표 직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터키를 겨냥한 위협 메시지까지 내놓았다. 그는 ‘터키군이 시리아 북동부 국경 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쿠르드족을 말살시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터키의 경제를 싹 쓸어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터키에 대한 경고는 딱 거기까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키로 한 자신의 결정을 옹호하기 위해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우리를 돕지 않았고, 예를 들어 노르망디 전투에서도 우리를 도운 적이 없었다”는 궤변을 꺼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은 그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라며 “누군가가 오늘 매우 힘있는 기사에서 썼듯이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땅에서 우리를 도왔다. 이는 (2차 대전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쿠르드족의 일은 쿠르드족의 일일 뿐이며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기사는 보수 논객인 커트 쉴리히터가 온라인매체 타운홀에 기고한 글로 알려졌다. 자신들의 땅에서 이슬람국가(IS)를 몰아내야 한다는 쿠르드족의 목표와 IS 격퇴를 바라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일치해 함께 전쟁을 치렀을 뿐, 이는 자신의 영토에서 벌어지지도 않은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의 사례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북동부 국경을 넘어 지상작전을 수행 중인 터키군. 터키 국방부 제공

확고한 철군 결심, ‘동맹 크루드’는 인종 말살 위기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보다 미군 철군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성명에서 “이제 이 구역(시리아 북동부)에 미국 병사들은 없다”며 더이상 중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정치 무대에 들어온 첫날부터 나는 이처럼 끝없고 무분별한, 특히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왔다”고 강조했다.

백악관 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제야 끝없는 전쟁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며 철군의 정당성을 거듭 주장했다. 그는 “내 생각에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중동에 들어간 것”이라며 “(철군 결정은)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트위터 등을 통해서는 비용 문제를 적극 부각시켰다. 미국이 중동에서 전투와 치안 유지에만 8조 달러(약 9600조 원)을 사용했다고 했고, 무기와 탄약을 쿠르드족에 지원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고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만 ‘동맹 크루드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일축하며 “터키는 민간인과 기독교인을 포함한 종교적 소수자를 보호하고, 인도주의적 위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그들이 약속을 지키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민간인을 포함한 쿠르드족의 인명 피해가 현실화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인 시리아인권관측소는 터키군의 공격으로 민간인 8명과 쿠르드군 7명 등 최소 15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공습·포격은 물론이고 지상군까지 투입된 터키의 공세에 인명피해는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서는 인종 말살 우려도 나온다.

시리아에 남아있는 1000여명의 미군들 사이에서는 심한 무력감과 실망감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쿠르드 민병대가 주축인 시리아민주군(SDF)과 함께 복무하고 있는 한 미군 특수부대원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터키군의 만행을 최전방에서 목격하고 있다. 내 직업을 선택한 후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털어놨다. 미군 소식통들은 “쿠르드족이 공중 지원을 요청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의 공격에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전했다.

터키의 공격에 피란길에 오른 시리아 북부 주민들. AFP연합뉴스

‘아메리카 얼론’, 바닥으로 떨어진 ‘세계 경찰’ 위상
미국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 ‘세계 경찰’ 역할을 자임하며 크고 작은 지구촌 분쟁에 개입해 왔다. 개국초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에 침범해 국가 안정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해 철저한 고립주의를 견지했던 미국이지만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상황은 달라졌다. 거대한 두 전쟁이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펼쳐지면서 유렵 열강들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승전국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미국은 세계 제일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막강한 힘과 자본력을 갖춘 미국은 이후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저지하고,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을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국제 분쟁에 적극 개입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국제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희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탓에 고립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철저한 손익계산을 바탕으로 대외 정책을 펴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자국 이익을 저해하는 과거의 동맹 관계는 번거로운 걸림돌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터키의 군사 작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억류돼 있던 IS 무장대원들이 탈출할 수도 있다’는 지적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들은 유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아군인 공화당에서조차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트럼프 임기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당과 손잡고 터키에 대한 초강력 제재 법안을 추진하겠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공화당 서열 3위 리즈 체니 하원의원도 “미국은 동맹 쿠르드를 버렸다”며 “철군 결정은 러시아·이란 같은 미국의 적들을 돕고 IS 재건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반발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공화당 매파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분노케 했다”며 “트럼프는 이제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인한 민주당과의 전선 외)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됐다”고 전했다. AP통신도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한 최근 외교 정책에 환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미국 우선주의’가 실제로는 ‘미국 나홀로’를 뜻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