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판타지는 왜 부진한 걸까… 무리와 불리 사이 놓인 판타지극

입력 2019-10-10 10:42
드라마 '날 녹여주오'(tvN)의 한 장면. 방송화면 캡처


때는 1999년, 두 남녀가 ‘냉동인간 프로젝트’ 촬영을 위해 냉동 캡슐 안에 들어간다. 한 명은 잘 나가는 스타 PD고 한 명은 배짱 두둑한 취업준비생. 그런데 이게 웬걸, 하루 만에 깰 예정이었던 둘은 무려 20년이 지나서 깨어나고 만다. 여기에는 모종의 음모가 숨어있는데….

이 작품은 지난달 28일부터 방송 중인 ‘날 녹여주오’(tvN). 청량함을 뽐내는 배우 지창욱 원진아가 주연으로 나서 화제를 모았다. 백미경 작가의 차기작이라는 점도 기대에 불을 지폈는데, ‘힘쎈여자 도봉순’(JTBC·2017) 등 작품에서 재치 있는 필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날 녹여주오에도 발랄한 상상력이 듬뿍 담겨있다. 시간의 엇갈림으로 생기는 묘한 리듬감이 백미다. 여전히 젊은 PD 마동찬(지창욱)과 방송국 국장이 된 조연출 현기(임원희·이홍기)의 대화 장면이나 스마트폰 등을 어려워하는 주인공 모습 등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시청률은 제자리 상태다. 현재 4부까지 전파를 탄 극은 3%대를 맴돌고 있다. 아직 로맨스가 불붙지 않은 게 한몫하겠지만, 판타지가 설득력 있게 풀어지지 못한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냉동 캡슐 등 전반적 세트의 단출함과 빠른 전개는 이질감을 낳는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20년 후 깨어난 인물 이야기보단 코믹함이나 속도감을 강조한 게 되레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됐다”고 했다.


드라마 '웰컴2라이프'(MBC)의 한 장면. 방송화면 캡처


날 녹여주오의 문제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이채로운 설정을 가미한 판타지극 부진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종영한 ‘웰컴2라이프’(MBC)는 평행세계라는 독특한 설정을 버무렸으나 시청률은 4~6%에 그쳤다. 배우들의 호연이 두드려졌기에 아쉬움은 더 진하다.

평행세계 소재가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면서 상승세를 가로막은 이유 중 하나로 풀이된다. 악질 변호사 이재상(정지훈)은 교통사고로 정의로운 검사로 활약하는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이 세상은 ‘웬수’였던 형사 라시온(임지연)과 가정을 꾸리는 등 정반대 일들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정지훈의 능청스러운 연기에도 몰입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재상은 새 세계에 당황하면서도 너무나 빠르게 적응해나간다.

판타지극은 오랜 시간 브라운관 주력 장르였다. ‘별에서 온 그대’(SBS·2013) 등 숱한 작품이 이채로운 소재로 시청자를 사로잡아왔다. 하지만 최근엔 ‘호텔 델루나’(tvN) 등 몇 작품을 빼곤 ‘절대 그이’(SBS) ‘어비스’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이상 tvN) 등 대부분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브라운관이 현실감 넘치는 작품들로 재조정되면서 커진 판타지에 대한 이질감이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최근 몇 년 사이 넷플릭스를 거치며 급격히 높아진 시청자 안목을 이유로 꼽았다. 공 평론가는 “판타지는 특히 개연성 있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장르”라며 “쟁쟁한 글로벌 콘텐츠 속 구체적 문법을 갖춘 극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