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주인공 실존 모델 이극로, 1923년 독일서 한국어강좌 개설

입력 2019-10-07 13:51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류정환(윤계상 분)의 실존 모델로 알려진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극로 선생(1893~1978)이 1923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Humboldt University of Berlin)에서 한국어강좌를 개설했다는 독일 정부의 공식 문서 등 관련기록이 공개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이극로 선생이 독일유학 중이던 1923년 유럽 최초로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현재 베를린 훔볼트대)에 개설한 한국어강좌 관련 독일 당국의 공문서와 자필서신 등을 수집해 제공할 예정이라고 8일 밝혔다.

이번 이극로 선생 관련 기록은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4년 독일 국립 프로이센문화유산기록보존소에서 수집한 기록물 6철 715매 가운데 11매다. 국가기록원은 번역 등의 과정을 거쳐 일반국민에 제공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서 수집한 이 기록에는 1868년 발생했던 독일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보고서, 한국주재 독일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정세보고서 등 19~20세기 초 한국 정치·경제·외교 관련 기록물 등이 포함돼 있다.

경남 의령 출생인 이극로 선생은 1920년 중국 동제대학을 거쳐 1922∼27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뒤 1923년 유럽 최초로 베를린 훔볼트대에 조선어강좌를 개설해 강의했다. 이어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6년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역임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구금됐다.

영화 ‘말모이’ 주인공 류정환은 부유한 친일파의 아들로 묘사되지만, 실존 모델인 이극로 선생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고학으로 유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록물 11매 가운데 공문서는 5매로 베를린 훔볼트대 동양학부와 독일 문교부, 이극로가 한국어강좌 개설과 관련 주고받은 것이다. 1923년 8월 10일 동양학부 발송 975호는 학장대리가 문교부 장관에게 한국어강좌 개설허가를 요청한다는 것이며, 같은 해 8월 31일 문교부 발송 8593호는 이를 허가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극로 선생의 요청으로 유럽 최초로 베를린 훔볼트대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됐음을 입증하는 공문서다. 지금까지는 1922년 베를린 훔볼트대 철학부에 입학한 이극로 선생이 몽골어를 수강하던 중 동료 학생들에게 틈틈이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이들이 강좌개설을 요청해 이를 대학에 건의하면서 성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007년 이 기록을 발굴해 국내에 처음 발표한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이 때의 경험이 경제학 박사인 이극로가 훗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어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사업을 완수한 어문운동가의 길을 걷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기록은 96년 전 이미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국어강좌가 있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독일 학계에 알려진 1952년 한국어강좌 최초 개설을 29년이나 앞당긴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이극로의 어문학적 업적을 연구해 온 차민기 박사(경희대)는 “그가 수학한 베를린 훔볼트대는 언어학을 기반으로 설립된 대학이어서 언어를 민족구성의 중요 요소로 여겼다”면서 “이런 학풍의 영향으로 언어에는 민족의식이 담겨있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한국어 강의경험 역시 민족운동으로서 어문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차 박사는 “이극로는 학업을 마친 이후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 머물렀는데 프랑스와 독일의 음성실험실에서는 한국어 음성실험에 피실험자로 직접 참여했으며 귀국 후 이를 토대로 한국어 음성학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유럽 유학생 독립운동을 연구한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은 “이극로는 유럽 최초 유학생 단체인 유덕(당시는 독일을 덕국으로 표기) 고려학우회에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독일인 부르크하르트가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재일한인 참상을 독일신문에 기고하자 그를 찾아가 일본의 대량학살 진상을 듣고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해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며 “한글학자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도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