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56)씨가 당초 모방범죄로 알려진 8차 사건까지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씨가 자백한 14건의 살인사건과 30여 건의 성범죄에 대한 경찰의 신빙성 검증작업이 주목되고 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이씨가 자백한 사건들에 대해 과거 수사기록 등을 토대로 철저히 검증해 의혹이 남지 않도록 하겠다고 6일 밝혔다.
8차 사건은 1차부터 7차까지 벌어진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한동안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이 현장에서 발견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모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 분석 결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으로부터 받아 이를 토대로 검거된 윤모(당시 22세·농기계 수리공)씨가 수사기관 조사에서 범행을 털어놓아 모방범죄로 사건이 일단락 됐다.
문제는 30여년이 지나 이씨가 과학적 기법으로 조사가 이뤄진 8차 사건마저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데다 윤씨가 수감된 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는 취지의 옥중 인터뷰를 한 사실까지 뒤늦게 알려지면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가 소위 ‘소영웅심리’로 하지도 않은 범죄사실에 대해 허세를 부리거나 경찰의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허위 자백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일 경우엔 적지 않은 후폭풍이 불가피하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오전 6시50분쯤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 살던 박모(당시 13세)양이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양의 목에는 누군가 조른 듯한 자국이 선명했지만 신체에서 발견된 흉기 흔적은 없었다.
이 사건 범행 수법만 놓고 보면 피해자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옷가지로 매듭을 만들어 손발을 묶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시그니처(범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취하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윤씨도 2003년 5월 시사저널과 옥중 인터뷰에서 “나는 8차 사건 범인이 아니다”며 “나처럼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놈이 어디다 하소연하나. 피살자 오빠와는 친구 사이며 여동생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어찌됐건 이씨가 자백한 14건의 살인사건 실체는 드러난 셈이다.
8차 사건을 포함하면 모두 10건에다 이씨가 저지른 나머지 살인사건은 모두 4건으로 충북 청주에서 2건, 화성 일대에서 2건이다.
이씨가 청주에서 벌인 살인 2건은 1991년 1월 27일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공사 현장 콘크리트관 속에서 속옷으로 입이 틀어막히고 양손을 뒤로 묶인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된 박모(17)양 사건과 1992년 6월 24일 복대동에서 발생한 가정주부 이모(28)씨 피살사건이다.
여기에다 2건의 살인은 1988~1989년 연이어 터진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인 것으로 여겨진다.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은 1987년 12월 24일 여고생이 어머니와 다투고 외출한 뒤 실종됐다가 열흘가량 뒤인 1988년 1월 4일 화성과 인접한 수원에서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6차와 7차 화성사건 사이에 벌어진 일인 데다 범인이 피해자를 결박하는 데 속옷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과 유사성이 높다.
또 1989년 7월 3일 또 다른 여고생이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 야산 밑 농수로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발생지역이 화성이 아니라는 점, 피해자의 손발이 묶이지 않은 점 때문에 화성사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찰은 이씨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8차 사건뿐만 아니라 이 씨가 자백한 모든 사건을 철저히 검증해 의혹이 남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후인 1994년 1월 충북 청주 자택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부산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 중이다.
수원=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