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춘식 맥거핀’과 따뜻한 시선이 만든 기적, ‘동백꽃 필 무렵’ [리뷰]

입력 2019-10-04 17:36 수정 2019-10-04 17:46
KBS 제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이 브라운관 속 활짝 꽃피우고 있다. 전파를 탄 지 단 3회 만에 10%(닐슨코리아) 고지를 밟았고, 3일 방송에서는 12.9%로 올라섰다. 최근 부진했던 지상파 드라마의 재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 셈인데, 이야기가 점차 풀어지면서 시청률 상승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극은 작은 어촌 마을 옹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싱글맘’ 동백(공효진)과 열혈 청년 용식(강하늘)의 로맨스를 그린다.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건 이 드라마가 최근 대부분 극처럼 해외 로케이션을 진행한 작품도, 제작비 수백억을 들인 블록버스터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언뜻 투박하면서 담백한 이 작품이 쟁쟁한 드라마들 사이에서 호평을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상춘식 맥거핀’… 절묘한 장르 버무리기
배우들의 호연과 뛰어난 영상미, 깔끔한 연출이 두루 어우러진 작품이지만 최고는 역시 임상춘 작가의 극본이다. ‘쌈, 마이웨이’(KBS2·2017) 등을 흥행시킨 그의 걸출한 작법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이질적인 장르인 로맨스, 스릴러의 조합은 동백꽃 필 무렵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다.

우선 제작발표회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난달 연출을 맡은 차영훈 PD는 동백꽃 필 무렵을 축구 전술에 빗대 설명했다. 차 PD는 “우리끼리는 이 드라마를 4-4-2 포메이션의 드라마라고 얘기한다”며 “넷 만큼의 멜로와 넷 만큼의 휴머니즘, 둘 만큼의 스릴러가 담겨 있다”고 전했다. 강하늘도 “1~4부까지 대본을 봤는데, 흔하게 볼 수 없는 대본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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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극은 로맨스 드라마임이 무색하게 동백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첫발을 뗐다. 그리곤 동백과 용식이 옹산에서 처음 마주치게 되는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갔다. 6부까지 전파를 탄 지금도 극 말미엔 어김없이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끝맺는다.

이를테면 ‘임상춘식 맥거핀’인 셈인데, 이 시점의 교차는 코믹하고 과장된 인물들과 맞물려 묘한 리듬감을 형성한다(동백이 ‘정말’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알려주는 복선일 수도 있다). 극 서사의 가장 큰 두 축은 동백-용식의 로맨스, 그리고 ‘까불이’라고 불리는 범인이 저지르는 범죄의 공포다. 드라마는 두 주인공의 사랑과 주인공의 죽음을 번갈아 보여주며 감정 진폭을 만들어낸다.

극의 배경은 옹산이라는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다. 시점 교차는 극이 가진 몇 안 되는 단점의 훌륭한 보완제 역할을 한다. 여타 드라마처럼 비행기가 떨어지거나, 유령이 나오는 등의 굵직한 사건 하나 없지만,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스릴러 요소는 깊은 몰입감을 끌어낸다. 까불이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 시선을 붙든다.

작은 공동체, 옹산에서 펼쳐지는 따뜻한 이야기
믿고 보는 ‘로코퀸’ 공효진과 청량함을 자랑하는 강하늘의 로맨스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공효진은 처연하면서도 굳센 동백을, 강하늘은 포기를 모르는 청년 용식을 깔끔하게 소화하며 시청자들을 설렘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고사했다가 여운이 남아 ‘다음 회차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었다. 그 정도로 매력적인 대본이었다”는 공효진의 말처럼 카메라 앵글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우연을 운명으로 바꿔내는 사랑의 힘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KBS 제공


그런데 조금만 더 찬찬히 살펴보면 더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는 게 있으니 바로 극의 배경이 되는 옹산이다. 주 촬영지는 포항시 남구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알려져 있는데, 대사의 충청도 사투리만큼이나 구수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이 작은 공동체는 스토리가 뻗어나가는 토대가 된다.

소공동체와 여성 주인공 등은 임 작가의 전작 중 하나인 ‘백희가 돌아왔다’(KBS2·2016)를 떠오르게 한다. 가령 동백은 옹산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곳에서 술집 까멜리아를 운영한다. 좌천 돼 옹산에 온 순경 용식은 그녀를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외지인 여성인 동백은 이 옹산에 정착하면서 배타적인 시선에 고통 받는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일지 모를 용식을 만나게 된다.

독특한 건 이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서사 전면에 서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어업이 마을의 주 수입원이고 게장 골목 중심으로 상권이 조성된 이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마을 생산력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은 포털 업계를 배경으로 여성의 끈끈한 관계를 그려내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tvN)와는 다른 맥락을 가져간다.

오히려 외지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배타적인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더 집중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부장 사회에서의 권력 질서가 묻어나기도 한다. 잘못을 저지른 남성들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여성의 싸움이 부각되는 식이다. 차기 옹산군수라고 자평하는 노규태(오정세)가 그런 케이스. 동백과 까멜리아 종업원 향미(손담비)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져 분란을 일으키지만, 외적으로는 규태의 아내 홍자영(염혜란)와 동백의 갈등으로 발현된다. 동백이 옹산에 갓난아이를 데리고 처음 등장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바깥사람’의 존재를 묻고, 동백의 아들 필구(김강훈)와 친구는 아버지의 부재를 놓고 씨름한다. 물론 규태와 동백의 전 애인 강종렬(김지석) 등 극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허영을 좇는 이들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갈등을 둘러싸고 풀어지는 외지 여성(동백)에게 가해지는 배배 꼬인 시선들은 역설적으로 차 PD가 말한 휴머니즘의 씨앗을 품어 시청자들을 빨아들인다. 작가가 전작들에서 보여준 사람에 대한 낙관이 어김없이 듬뿍 묻어나는데, 그건 극 속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공명 때문이다.

로맨스인 만큼 용식을 빼놓을 수 없지만, 동백-용식의 엄마 곽덕순(고두심)-동백의 엄마 조정숙(이정은), 이 3명의 인물은 색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홀로 용식을 키웠던 덕순과 동백은 싱글맘의 고통을 공유한다. 치매에 걸렸지만 다른 집의 가사 노동을 대신 해주며 생계를 이어온 것으로 추측되는 정숙은 홀몸으로 힘든 생계를 이어와야 했던 아픔을 함께하는 동시에 끈끈한 혈육 사이로 이어져 있다.


연합뉴스


동백은 무시와 핍박 속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인물이다. ‘용식은 내 불운한 인생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식의 대사가 자존감이 바닥에 다다른 동백의 처지를 보여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풀어진 이야기를 놓고 유추해보자면 동백-용식의 로맨스가 이뤄지면서 이들도 서로를 진정 이해하게 될 텐데, 극은 한층 극적인 감동을 위한 예비작업을 충실하게 해놓고 있는 셈이다. 또 동백의 죽음이 진짜가 아니라면, 동백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력(까불이)을 극복한 여성이면서 폭력적인 시선들을 스스로 극복하고 탄탄하게 성장해나가는 한 사람의 은유가 되기도 한다.

물론 모든 문제와 갈등이 로맨스로 봉합되는 이야기는 호불호가 갈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 냄새가 사라지는 시대에 이런 담백한 휴먼 로맨스가 호응을 얻는 게 고무적인 일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차 PD는 제작발표회 당시 “(동백이가) 성장하고 단단해지는 휴먼 이야기가 펼쳐진다”며 자신감을 드러냈었다. 옹산이란 작은 마을을 향한 기대의 시선은 점차 거세질 것 같다.

“따뜻한 드라마예요. 드라마를 보면 각자의 첫사랑도 떠오르고, 고향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고, 자고 있는 자녀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질 것 같아요. 자신 있습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