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까지 (영화 작업을) 실행할 수 있는 원동력은 불행했던 우리 근현대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자랐고, 고통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었던 우리 세대가, 영화를 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 정일성(90) 촬영감독은 4일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독재시절을 겪었다. 긴장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영화를 통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 정신무장 같은 게 됐다”고 했다.
회고전의 주인공이 된 데 대해서는 “젊은 시절에 미국의 한 영화인이 회고전을 하는 걸 보고 ‘어쩜 저렇게 평생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어언 나도 영화를 한지 60년이 넘었다”며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다. 나를 계기로, 앞으로 좋은 촬영감독들의 회고전이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일궈온 장인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촬영 세계를 구축한 촬영의 대가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입문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는 그만의 파격적인 앵글과 색채 미학을 선보이며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구축했다.
올해 한국영화 회고전에서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대표작 7편이 소개된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1980),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1986), 장현수 감독의 ‘본 투 킬’(1996)이다.
“회고전 작품은 내가 정한 게 아닙니다. 영화제 측에서 한 감독당 한 편으로 배정한 것 같아요. 내가 예상치 못한 작품도 있더군요. 그래도 괜찮지 않겠나 싶습니다. 제 영화라고 해서 다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한 작품들을 통해서도 정일성의 진면목을 보실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요.”
특히 임권택 감독과는 30여년간 명콤비로 활약했다. 임 감독과 ‘신궁’(1979)으로 처음 조우했고, ‘만다라’(1981)로 정일성 미학의 정점을 찍었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았던 미장센과 시퀀스로 국내 영화 사상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이후 ‘서편제’(1993) ‘취화선’(2002) 등 임 감독 대부분의 작품에서 카메라를 잡았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1980년 직장암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게 임권택 감독이다. 아직도 그 빚을 다 갚지 못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어 “임 감독과 호흡이 잘 맞았던 이유는 동시대 사회나 역사, 미래에 대한 생각이 거의 일치해서였다. 그래서 서로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반면 너무 오래 같이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이 오더라. 서로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에서 오랜만에 임 감독을 만났는데 서로 파안대소를 하며 부둥켜안았다. 앞으로 어떻게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 각자 젊은 감독들과 일해야 또 다른 기를 받아서 영화적 신세계를 마련하지 않을까 싶다”고 미소를 지었다.
후배 영화인들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해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 대해 개인적으로 축하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외에도 좋은 감독과 촬영감독들이 많은데 이름을 말하면 거기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할 것 같아 (여기서 줄이겠다)”고 말했다.
이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요즘 촬영감독들은 필름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을 하더라도 아날로그의 기술적 과정을 익혀야 좋은 촬영을 할 수 있다. 촬영감독은 감독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형상화할 것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감독에게 제안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감독의 이미지를 더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오랜 기간 영화를 해온 원동력에 대해서는 “나만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나눌 수 있죠. 보통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꿈이 없으면 리얼리즘은 한낱 뉴스로 전락합니다. 그보다 더 상위에 놓은 건 영화의 격조입니다. 촬영감독의 역할에 대해서도 늘 염두에 둡니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카메라를 잡은 그에게 못 다 이룬 꿈이 있을까. 그는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해온 것에 만족한다. 만족을 더 채우는 건 개인적인 욕심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38명의 감독과 작업했다. 20여편을 함께한 감독이 있는 반면 한 편으로 끝나버린 관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나를 있게 한 3분의 1은 그 감독들의 힘이 아닌가 싶다. 나머지 3분의 1은 남편이 떠돌이 생활하다시피 하는데도 홀로 집을 지켜준 아내의 공로다. 나머지 3분의 1이 나의 능력”이라고 답했다.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영화가 뭘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과거에 했던 영화를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영화라는 게 내 마음대로, 나 혼자 정리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를 모르는 젊은 감독이 어느 날 느닷없이 ‘같이 영화를 하자’고 제안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부산=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