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어떤 일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입력 2019-10-02 14:26
시간은 해안가의 모래처럼 쌓이다가 어느 순간 모래성처럼 부서지기 일쑤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망각하는 일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김선재의 소설집 '누가 뭐래도 하마'는 바로 이런 지점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픽사베이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끔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때가 있다. 옛 친구를 만나 지난 시간을 더듬다가 ‘그땐 그랬지’로 이어지는 추억놀이를 할 때 그렇고, 서로의 예전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내가 왕년에는’으로 이어지는 추억팔이를 할 때 그렇다. ‘추억’이라고 했거니와, 옛 친구와는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려 그때의 좋았던 기분을 고스란히 현재로 옮겨오는 것이 놀이의 핵심이고, 현재의 인연에게는 지난날의 내 모습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이야기가 잘 팔린다. 그렇게 아득한 시간을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보다 서로 묻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넌 언제로 가고 싶어?” 나는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하곤 했다. “없어. 나는 빨리 살아치워버렸으면 좋겠어.”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기억이 수면 아래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다.

과거를 돌아보기 두려운 것은 비단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시간들이 쌓여 오늘에 닿았으니, 오늘의 내 삶이 만족스럽지 못할수록 기억은 더 아프게 남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세워보는 것뿐. 그러나 이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물며 내 의도, 혹은 의지와 무관하게, 아니 나와는 무관하게 나를 몰아세운 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는 좌절이 내겐 있었다. 그러니 그때로부터 되도록 멀리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김선재 소설집 ‘누가 뭐래도 하마’는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다음에는 잃었다는 사실도 자주 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과거의 기억에서 도망가는 것을 ‘빨리 살아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시간에 맡겼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 ‘망각’으로 도망간 사람들이다. “이 세상을 구하는 건 영웅이 아니라 망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눈이 내리는 동안은 세상이 평화로운 것처럼 잊고,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동안에는 모든 것이 편”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멍 자국처럼 선명해진다는 걸”, “흔적은 사라져도 통증은 남는다는” 걸 그들은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통증에 대해서만큼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망각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상과 주변 사람들의 발길질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들에게도 생생한 고통을 전해온다. 그들은 그렇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산송장”이 되거나 “무성(無性)의 인간”이 되어 “전날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으로 죽음에 가까운 삶을 산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기억을 지운다 해도, 지나간 어떤 일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문득’ 출현하여 ‘문득’ 이전과 이후의 삶을 나누고, 다시 한 번 그들을 무너지게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돌아가고 싶은 지난 시절은 없지만, 내가 오늘을 도망가는 일로 쓰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아치우는 일에도 기억을 지우는 일에도, 어쨌든 살아야 하는 오늘은 있다. 여덟 편의 작품을 읽은 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았을 때, 나는 다시 가장 앞에 놓인 표제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인공 ‘양’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싸야 할 때 싸는” 동물의 할 일을 “가장 우아하고 당당하게 해내는 동물” 하마를 보는 장면에서, 사람의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 작가 김선재는 그것이 용서를 비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는 일에 대한 사과. 그것이 희망이고, “삶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멋진 일이니까.”

<김필균 출판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