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촛불 든 시민들이 지난 28일 서울 서초대로와 반포대로 1.6㎞ 구간을 가득 메웠다. 느닷 없이 촛불이라니. 지난 두 달간 조국 법무부 장관은 대선후보급의 집중 검증과 비난을 받았다. 국회 인사청문회 날짜를 잡는 데만도 여야가 2주일 넘게 실랑이를 벌였고, 그 와중에 생방송 기자간담회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형식의 대국민 검증까지 받았다. 비난은 임명 후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거세졌다. 말(言)로 때리는 게 가능했다면 조 장관은 가루가 됐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거칠었던 두 달 난타전의 끝은 자진사퇴 또는 해임이거나 법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뜻밖에 촛불이었다. 조국이 가루가 되는 대신 이야기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 조 장관, 윤석열 검찰총장의 삼각 구도였던 ‘조국 드라마’에 촛불이라는 새 주인공이 합류한 것이다. 사각구도는 훨씬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경로를 예고했다. 이 드라마는 2016년 탄핵 촛불시위와도 다른 장르가 될 모양이다. 당시 집회는 서서히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예열 과정도 없었다. 느닷없이 수십만개(주최측 200만명, 자유한국당 최대 5만명)의 촛불이 몰려들었다. 탄핵 당시에는 중도층을 포괄하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반면 지난 토요일 시위대는 ‘친문과 조국’으로 똘똘 뭉쳤다. 이런 이유로 반대자들이 숫자를 물고 늘어져봐야 시위의 규모만 키워줄 뿐이다. 숫자가 충분치 않다고? 그럼 이번엔 제대로 보여줘? 시위대는 승부욕에 불타게 될 거다. 규모 대신 주목할 대목은 어딘가에서 이런 목소리가 끓고 있었다는 걸 세상이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저 많은 조국 지지자는 대체 어디 숨어 있었다가 강남 한복판에 나타났단 말인가.
동영상을 보니 시위대 표정은 동지들을 만난 흥분으로 한껏 상기돼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그런 감격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몇시간 동안 지치지도 않고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을 외쳤는데 둘은 하나처럼 들렸다. “조국은 검찰 개혁 깃발이자 장수”라는 어느 참가자의 말이 모든 걸 설명했다. 깃발을 뺏기면 치욕이다. 장수를 잃으면 패전이다. 그러니 조국을 지키는 게 검찰 개혁이다. 조국을 수사하는 윤석열은 반개혁세력의 적장이다. 이날 집회에서 검찰만큼이나 두들겨 맞은 건 언론이었다. 적폐인 검찰발 뉴스를 ‘받아쓰기’ 한다는 혐의였다. 검찰과 언론의 협잡을 비판하려면 ‘논두렁 시계’ 한마디면 끝이었다. 검찰이 흘리고 언론이 받아쓰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런 강력한 이야기로 지지자들은 묶여 있다.
윤 총장 입장에서 이런 전개는 억울할 거다. 언론도 납득하기 어렵다. 조국 가족 수사는 ‘살아 있는 권력’에도 엄격하라는 임명권자의 하명 하에 시작됐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대선 댓글 조작과 국정농단, 이명박 전 대통령·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수사 때 그랬듯 죄 있는 곳에 검찰 수사가 있을 뿐이다. 동일한 항변이 언론에도 적용된다. 기자는 수사기관이 아니므로 합리적 의심이 들면 기사를 쓴다. 대상이 권력이면, 그럼 집요함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정보의 보고는 검찰이고, 탄핵정국에서 언론은 검찰발 뉴스를 충실히 소개해 박수받았다. 언론은 최순실 게이트를 팠던 그 방식 그대로, 조국 스캔들을 캐고 있을 뿐이다. 그때는 맞았던 게 지금은 왜 틀린가. 검찰도, 언론도 어리둥절하다.
비난하는 게 정치권뿐이라면 검찰과 언론은 마음 편히 정의의 편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분노한 개인이라면 달라진다. 군중이 절대선일 리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일 때는 이유가 있다. 서초동을 밝힌 촛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언론이 검찰과의 관계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논두렁 시계’의 정보 네트워크를 깰 수 없다면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요원하다. 어쩌면 문제는 정말로 ‘내편’을 공격할 때만 화를 내는 여론의 변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말을 하려면 언론이 먼저 해야 할 숙제가 있다. 검찰 의존증을 벗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숙제를 끝낼 유일한 길이 검찰 개혁인지도 모르겠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