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로 논란이 일었던 국제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교부할 예정이던 지원금을 철회했다.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은 문화청이 26일 아이치 트리엔날레 지원금 재심사 결과 당초 약속한 7800만엔(약 8억7000만 원)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문화청은 아이치 트리엔날레 측이 ‘전시장의 안전과 원활한 운영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를 예상하고도 사전에 신고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 중대한 사태란 소녀상 전시에 반대하는 세력이 아이치현청 등에 협박 팩스나 메일을 보내 위협한 것을 의미한다. 문화청 관계자는 “전시 내용 때문에 교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소녀상 전시를 문제 삼아 지원금을 철회한 셈이다.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총 사업비는 약 12억엔이며 소녀상이 포함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는 약 420만엔이 투입됐다. 원래 아이치현이 약 6억엔, 나고야시가 2억엔 그리고 문화청이 7800만엔 보조금을 각각 내기로 되어 있었다.
문화청의 철회 결정에 일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예술계와 학계에서는 지원금을 국가에 대한 충성도로 정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이번 사태는 정부가 문화예술에 대한 모든 지원금은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결정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영화평론가 마치야마 도모히로 역시 “정부의 입맛에 맞춘 문화예술에만 지원금이 나온다면 앞으로 전쟁에 대한 역사적 전시에도 이번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법조계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시가현 변호사협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나 국가가 잘못해도 시정할 수 없게 된다”면서 “정부 관료나 지자체 수장이 전시회 중지를 요구하거나 지원금 중단 여부를 언급한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헌법학자 기무라 소타도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 지원금은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면서 “이번과 같은 이유로 철회하면 부적절한 이유의 지원금 운용이 횡행하고, 특정 표현에는 지원하지 않을 위험이 높다”고 우려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실행위원장인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보조금을 주지 않는) 이유가 합리적인지 국가와 지방의 분쟁처리위원회를 통해 확실히 확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지난 8월 1일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를 개최했다가 우익 세력의 거센 항의와 테러 협박을 받아 결국 사흘 만에 전시 중단을 결정했다. 이후 예술에 대한 검열 논란이 벌어졌고, 여러 시민·예술단체들이 반발하며 소녀상 전시 재개를 촉구해 왔다.
아이치현이 전시 중단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구성한 검증위원회는 전날 발표한 중간보고서에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전시를 중단한 것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제한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검증위원회는 전시 재개를 권고했지만 전시 방식 개선 등의 조건을 달아 사실상 검열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즉 전화나 팩스 등에 의한 협박이나 공격 위험 회피, 전시 방법이나 해설의 개선, 사진 촬영이나 SNS에 의한 확산 방지 등의 조건이 검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교도통신은 검증위가 내놓은 중간보고서에 대해 전시 중단이 ‘검열’이라는 비판을 누그러뜨리고 앞으로 일본에서 열리는 예술제 등에 미치는 영향(출품 거부 등)을 피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검증위의 조건을 충족하기 쉽지 않아 다음 달 14일 아이치 트리엔날레 종료 전에 전시회를 재개하는 것은 불투명하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