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의 컴백 전쟁을 그린 ‘퀸덤’(엠넷)이 시작할 당시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서바이벌 예능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했고, ‘프로듀스X101’이 투표 조작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룹 줄 세우기’로 불필요한 팬덤 대결을 부추긴다는 팬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조욱형 PD는 지난 8월 제작발표회 당시 관련 질문에 “우리 축구팀이 다른 지역팀들과 붙어보면 어떨까 하는 의문에서 축구가 전 세계적 규모의 스포츠로 발돋움했다”며 “동시에 격돌하는 스포츠 시스템을 음악에서도 재현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퀸덤은 박봄 AOA 마마무 러블리즈 오마이걸 (여자)아이들 6팀의 정면 승부를 다룬다. 음악 시장에서 아티스트들이 컴백 시기를 겹치지 않도록 조율해왔던 불문율을 깬 것이다. 이들은 다음달 25일 정오에 싱글 앨범을 동시 발매하고 경연과 파이널 무대 결과 등을 종합해 승자를 가리게 된다.
팬들의 우려처럼 지난달 29일 첫발을 뗀 퀸덤에는 팬덤 간 자존심 싸움을 붙이는 듯한 요소들이 적지 않았다. 경연에서 꼴등을 두 번 하는 그룹은 프로그램에서 불명예 하차를 해야 한다거나, 출연자들이 자기 팀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하는 팀을 공개 지목하는 광경 등이 화면에 담겼다.
유사한 경연 프로그램의 재현에 그칠 뻔했던 퀸덤에 숨결을 불어넣은 건 다름 아닌 출연진인 걸그룹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달리 누군가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경연 프로그램이지만 출연진이 서로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모습이 담긴다”며 “걸그룹 버전의 ‘나는 가수다’(MBC)를 떠오르게 한다”고 평했다.
6팀은 뛰어난 퍼포먼스로 다른 가수의 노래를 뚝딱 재해석해내는가 하면 새로운 콘셉트의 무대를 불과 며칠 만에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저마다의 고민을 듬뿍 담은 공연에서 정형화된 걸그룹이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퀸덤의 가장 특별한 점인데, AOA가 커버한 마마무의 ‘너나 해’ 무대가 대표적이다.
그룹 리더 지민이 기획한 이 무대는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나는 나무)”라는 랩으로 운을 뗀다. AOA 멤버들은 짧은 치마, 하이힐이 아닌 정장 바지와 단화를 신고 무대를 누볐고, 남성 보깅 댄서들은 화려한 메이크업과 핫팬츠, 하이힐로 꾸민 채 관능적인 춤을 선보였다. 고정관념을 자유롭게 벗어던진 무대에 네티즌들은 열광했는데, 해당 공연 공식 유튜브 클립 영상의 조회 수는 800만회에 달한다.
이런 호응에 힘입어 퀸덤은 CJ ENM과 닐슨코리아가 공동개발한 콘텐츠 파워 지수에서 9월 2주차 종합 1위를 차지했다. 화제성 분석 기관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의 3주차 비드라마 화제성 순위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경쟁이나 자극적 편집보단 여성 아티스트들의 창발성을 담아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정 평론가는 “이야기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의미 있는 수확들을 함께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기존 걸그룹의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등 대안적인 음악 프로그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