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사이의 갈등 국면에서 대체로 이란 편을 들어줬던 유럽 국가들이 등을 돌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시설 공격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며 맹비난했다.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준수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협상이 필요하다는 뜻도 피력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아예 JCPOA가 ‘나쁜 합의’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의기투합했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존슨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3일(현지시간) 공동성명에서 “3국 정상은 사우디 영토 내 석유 시설 공격을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며 “이번 공격의 책임이 이란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 외에 이치에 맞는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존슨 총리는 이미 사우디 석유시설 공격이 이란 소행이라고 밝힌 바 있으나 마크롱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가 호응한 건 처음이다.
아울러 3국 정상은 “JCPOA를 향한 우리의 지속적인 헌신을 환기한다”면서도 “이란은 미사일 개발을 포함한 지역 안보 문제뿐 아니라 핵 개발과 관련한 장기적인 협상틀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이란의 핵무기뿐 아니라 미사일도 규제 가능한 포괄적인 합의를 새로 맺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일정 부분 동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3국은 대(對)이란 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미국 측 주장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존슨 총리는 더 나아가 JCPOA는 잘못된 합의이며 트럼프 대통령이 새 합의를 이끌어낼 적임자라고 치켜세웠다. 존슨 총리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올바르게 말했듯이 JCPOA는 나쁜 합의인 게 사실”이라며 “JCPOA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존슨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두고 “이란처럼 어려운 상대로부터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트럼프식 합의가 도출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존슨 총리의 발언에 반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만나 “존슨 총리가 가장 먼저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라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며 “그것이 바로 존슨 총리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존슨 총리는 영국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사람인 이유이기도 하다”고 부연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존슨 총리가 찰떡 공조를 과시하면서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 미국에 더욱 경도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란은 유럽 3국 정상의 요구를 일축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트위터에 “기존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기 전까지는 새 합의를 맺는 일은 없다”고 밝혔다. 자리프 장관은 그러면서 “유럽 3국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자신들의 의무사항을 이행할 수 없는 마비 상태에 빠진다”며 “(3국이) JCPOA에 부합하지 않는 미국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요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데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게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리프 장관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영구적으로 제재를 완화하면 이란도 영구적 비핵화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