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술 거리를 걷다] 7. 상하이의 감각적 화풍을 받아들이다

입력 2019-09-23 06:00
중국과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근대’라는 이름을 띤 외부의 공기가 막 들어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20세기 초입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예술 취향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당시에 미술시장이 주 수요층으로 부상한 중인 부유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그림을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채색과 길상성, 그리고 장식성이었다. 장수하고, 복을 누리고, 부자가 되고, 자손을 많이 낳아 가문이 번성하는 등 현실적 욕망을 시각적으로 담아낸 도석道釋인물화(불교와 도교의 인물을 그린 그림), 화조화, 화훼초충화, 기명절지화 등이 선호되었다.

# 추사 김정희의 ‘서권기’ ‘문자향’ 의 문인화 취향을 밀어내고

이는 19세기 중반까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이끌던 문인적 취향의 남종화풍의 득세가 한풀 꺾였음을 의미한다.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강조하던 남종화풍은 책의 기운, 문자의 향기라는 뜻에서 보듯, 산수화의 나뭇가지에서도 서예의 기운이, 난초 그림에서도 서예의 필법이 강조되었다. 김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유행한 문인화지상주의는 ‘완당 바람’이라 불릴 정도로 거셌다. 18세기의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 김홍도 등 화원화가들이 꽃피웠던 풍속화의 유행이 소멸되다시피 정도였다.
<세한도>, 1844년. 문자향 서권기를 주창하는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이다.

그랬던 문인화풍의 남종화는 19세기 중반 무렵 ‘여항 문인사회’를 주도하던 조희룡趙熙龍(1789~1866)과 유최진柳最鎭(1791~1869)이 사망하면서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런 와중에 대중적 취향의 청나라 해상화파 그림이 개항의 파고를 타고 밀려든 것이다.
고람 전기, <계산포무도>. 추사 김정희의 영향이 느껴지는 문인화이다.

산수면 산수, 인물이면 인물, 꽃이면 꽃, 동물이면 동물 등 모든 화목에서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올랐고, 특히 중국 취향을 가진 신흥 부유층의 입맛에 맞는 기명절지화를 조선 화단에 보급하며 최고 인기를 구가한 장승업의 시대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 덕분에 가능했다.

시정의 직업화가 뿐 아니라 신명연申命衍(1809~1886), 남계우南啓宇(1811~1888), 홍세섭洪世燮(1832~1884) 등 문인화가조차도 시대적 미감에 맞춰 길상적인 의미가 담겨 있고 채색의 화려한 장식성을 갖춘 나비 그림, 기러기 그림 등을 그렸다.

이를테면 영모화翎毛畵(새와 동물을 그린 그림)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홍세섭은 한 쌍의 오리를 전통적인 수묵으로 그리면서도 자신만의 감각적인 엷은 먹의 방식으로 부부의 행복이라는 당시 유행한 통속적 소재를 소화해냈다. 또 신위의 아들인 신명연은 진한 채색의 절지화훼도와 나비 그림을 남겼다. 신명연의 〈접희락화도蝶戱落花圖〉는 화려한 진채를 써서 나비가 떨어지는 꽃잎을 희롱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나비 ‘접蝶’은 80세 노인을 뜻하는 ‘질耋’과 발음이 같아 장수를 상징한다.
신명연, <접희락화도>, 1864년,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런 그림들이 등장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19세기 후반 청과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수입된 중국 시전지詩箋紙의 영향이 있다. 예컨대, 신명연의 〈접희락화도〉는 북경 금성호 시전지 나비 그림과 유사하다.

# 중국에서 수입된 시전지 예쁜 그림에서도 영향받다

시전지는 종이에 색을 첨가하거나 문양을 찍어서 미감을 자극하는 일종의 예쁜 편지지이다. 인천-상하이 정기 노선을 타고 수입된 중국 시전지는 조선의 시전지에 비해 색상이 다양하고 화려할 뿐 아니라 중국 해상화파 화가들의 작품이 인쇄돼 있기도 했다. 베이징, 소주, 톈진, 상하이 등지의 여러 상점에서 제작 판매한 시전지에 그려진 그림은 임훈, 전혜안, 금란, 허곡, 주한, 호공수, 양유곡, 주칭, 마문희 등 대부분 해상화파의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 시전지는 개화기 조선의 일상에서 소비되며, 동시기 해상화파 화가들의 다양한 개성적 화풍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는 개화기 한국의 문인화가나 직업화가들이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청나라에서 수입된 시전지. 고궁박물관 소장

청나라의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그림은 다각도로 유입이 되었다. 물건뿐 아니라 사람들도 더 빈번하게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중국에서 발간된 수입 화보를 구해서 보기도 했다. 당대 가장 인기를 끈 직업화가 장승업의 경우는 해상 화파 화보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미천한 집안 출신의 장승업에게 상하이를 직접 방문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값비싼 중국 서화와 더불어 화보를 소장하고 있던 ‘후원자들’ 덕분에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화풍의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 장승업, 상하이 화풍의 최대 수혜자로

우선 고아로 떠돌던 장승업이 서울로 흘러들어와 기식하던 곳이 수표동에 거주하던 역관 이응헌李應憲(1838~?)의 집이었다. 이응헌은 원元, 명明 이래의 중국 유명 서화가의 작품을 많이 수장하고 있었고, 그의 집에는 그림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는 일이 잦았다. 물도 긷고 장작도 패주고 마당도 쓸어주면서 밥을 얻던 떠꺼머리 총각 장승업이 어깨너머로 배운 기막힌 그림 재주를 발견한 이응헌이 장승업을 화가로 키워준 것은 알려진 일화다.

장승업은 서화 감상과 수집 취미가 있었던 변원규卞元圭(1837~1894 이후)의 집에서도 고용살이했다. 변원규는 구한말의 역관으로서 중국 청나라와의 외교 업무에 관여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었고 중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한성판윤 벼슬까지 한 인물이다.

장승업은 40세가 되던 1882년부터는 역관 출신의 정치가이자 서화가, 서화 수집가였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동생 오경연吳慶淵(1841~?)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하며 그가 소장한 중국 회화나 상하이 발간 화보를 많이 보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장승업이 기명절지화를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장승업의 그림 인생에 얽힌 이런 ‘후원가들’의 이야기는 그림 감상과 수집 취미가 당시 성공한 중인들의 보편적인 경향이었음을 보여준다. 중인뿐 아니라 고종의 최측근이었던 민영환閔泳煥(1861~1905)도 장승업을 아꼈던 후원자 중의 하나였다.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오늘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윤 등 높은 벼슬을 두루 지냈고,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청과 일본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도 참석하기도 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던 인물이 그다.

그림을 둘러싼 두 사람의 일화는 장승업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다. 그림 재주가 소문이 나면서 벼락감투까지 쓰고 고종에게 불려가 10폭 병풍 그림을 주문받았다. 자유분방했던 장승업은 궁궐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뛰쳐나가는 바람에 고종의 노여움을 샀고, 마침내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민영환이 나서 “본래 장승업과 친하오니 저의 집에 가두어 두고 그 그림을 끝내도록 분부해주시기를 간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장승업이 화명을 날린 것은 40대 이후로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시기와 일치한다. 1880년대를 전후해 두각을 나타냈던 오원 장승업이 형성한 ‘오원 양식’에는 청나라 해상 화파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장승업의 성취를 개방의 파고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장승업의 그림 속에 어른거리는 상하이 화풍에 대해서는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