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치잡이’했다며 독도 소유권 주장하는 일본, 한국 박물관에 반박 증거 있다

입력 2019-09-13 07:01
日 연구소, 강치잡이 기록 들며 독도 소유권 주장
한국 보유한 일본 기록 보면 日은 한국 영토 인정
영토 확장 야욕, 독도 강치 멸종만 불러

독도 강치. 자료=해양수산부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의 명물로 ‘바다사자’가 꼽힌다면 한국 독도의 명물로는 ‘강치’가 있다. 강치는 울릉도와 독도를 쉼터로 삼았던 한국 토종 바다사자다. 다만 그 존재는 과거형이다. 국제기구인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1990년대에 공식적으로 강치 멸종 선고를 내렸다.

그런 강치를 현대로 소환하려는 시도가 일본 사회에서 또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다만 그 의도가 불순하다. 요미우리신문은 영토 문제를 연구하는 ‘일본국제문제연구소(JIIA)’가 강치잡이 어민 후손들의 증언을 담은 영상을 연내 공개한다고 지난 5일 보도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다. 강치 멸종 원인인 일본식 강치잡이의 역사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도 자체가 되레 독도가 한국 땅임을 증명하는 자충수라고 설명한다. 기록으로 남은 일본 강치잡이의 역사는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울릉도와 독도 인근까지 배를 몰고 와 강치를 잡던 일본 어민들에게 에도 막부는 판결을 내린다. ‘조선 땅이니 강치잡이를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1800년대에는 이를 기록한 현판까지 내걸렸다.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죽도제찰(죽도는 울릉도의 옛이름)’이 그것이다. 강치잡이의 기록은 독도의 영유권이 한국임을 입증하고 일본이 어족자원을 수탈해왔다는 증거다.

독도 강치 추정 이미지. 자료=해양수산부

‘강치’는 어떤 동물인가
강치는 바다사자과의 해양 포유류다. 최대 2m50㎝까지 자라며 성체의 몸무게는 560㎏까지 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앞바다나 남미 에콰도르에 분포하는 사촌격인 바다사자보다 크기나 무게가 더 나간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소’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강치의 생김새가 ‘수우(水牛)’를 닮았다고 기록했다.

울릉도와 독도 연안이 주 서식처였다. 독도의 가제바위는 강치에게 최고의 휴식터로 꼽혔다. 이외 러시아 연해주나 일본 연안에서도 발견됐지만 대다수의 기록은 한국의 두 섬을 중심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1800년대 말까지만 해도 4만~5만 마리가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는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감소한다. 일제강점기에 강치 가죽을 노린 일본 어부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개체 수가 줄었다. 여기에 1951년 미군이 독도를 해상폭격 연습지로 지정하면서 강치 멸종에 기름을 부었다.

수탈의 피해자인 강치의 관찰 기록은 1970년대로 끝을 맺는다. 제주대 석좌교수이자 강치 연구 권위자인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이 편찬한 ‘독도 강치 멸종사’에 따르면 1975년 독도에서 두 마리가 확인된 게 마지막이다. IUCN은 1994년에 강치가 최종 멸종했다는 판정을 내렸다.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말대로 인간의 존재가 강치를 멸종으로 내몬 것이다. 그는 인간 존재 이전 생물의 멸종 속도는 매년 100만종 중 1종 정도였지만 현재는 그 1000배에 가깝다고 계산한 바 있다.

해양수산부가 2015년 9월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세운 강치 동상. 자료=해양수산부

강치사냥 역사,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증거
강치의 멸종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일 뿐이지만 한·일 양국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독도 소유권 분쟁의 중심에 강치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강치사냥의 역사를 토대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일본국제문제연구소가 강치잡이 후손을 찾아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라는 게 정론이다. 단적으로 이를 증명하는 인물이 조선 어부인 안용복이다. 안용복은 1600년대에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까지 넘어와 강치잡이를 하자 두 차례 일본에 넘어가 항의했다. 시기적으로는 1693~1696년으로 기록된다. 이에 강치잡이 어부들이 거주하던 쓰시마섬의 도주 소요시자네가 에도 막부에 이 문제를 아뢴다. 자신들의 땅임을 증명해달라는 청원이다.

1695년에 나온 에도 막부의 답은 명쾌했다. “그 땅의 지리를 헤아려 보건대 쓰시마섬 이나바주와의 거리는 160리, 조선과의 거리는 40리쯤이라서 조선 땅이라는 데 의심이 없다”며 “쓸모없는 조그마한 섬을 가지고 이웃나라와 우호관계를 잃음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당초에 이 섬을 저 나라에서 빼앗은 것이 아니니 돌려준다고 말할 수도 없다”며 “일본 사람이 (섬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해야 할 뿐이다”라고 밝혔다. 이 시기는 조선통신사가 양국을 오가던 시절이다.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한 판결로 읽힌다.

독도가 조선 땅임을 증명하는 내용의 '죽도제찰'. 자료=국립해양박물관

1800년대에도 울릉도와 독도에서의 조업은 조선의 영토인만큼 불법이었다. 국립해양박물관이 보유한 죽도제찰이 이를 증명하는 유물 중 하나다. 이 유물은 1837년에 세워진 목판으로, 울릉도와 독도(당시 송도) 일대가 조선의 땅이므로 항해와 어로 활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13일 국립해양박물관 관계자는 “죽도제찰은 2011년에 국내 옥션을 통해 구매한 역사적 자료”라며 “금액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말해다.

영토 확장의 욕심, ‘야만적 학살’ 불렀다
이런 기록이 있음에도 일본이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영토 확장의 야욕이 숨어 있다. 일본 정부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공표한 시점은 1905년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시기다.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어부가 강치잡이를 위해 소유권 주장이 필요하다고 상소한 게 계기가 됐다. 강치를 잡겠다는 욕심이 타국 영토의 소유권 주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소유권 논란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강치는 멸종을 맞게 된다. 강치잡이를 위해 설립된 ‘다케시마 어렵합자회사’는 1905년부터 해방 이전까지 연간 많게는 3000~3200마리의 강치를 잡아들였다. 일본의 욕심이 강치의 절멸이란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해양수산부가 강치의 유전자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현존하는 기술로는 복원이 힘들다고 한다. 주 관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강치 다량 학살에 대한 색맹과도 같은 시각은 그 자체로 반문명적”이라고 비판했다.

세종=신준섭 전성필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