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포인트. 라파엘 나달(2위·스페인)의 공이 시속 199㎞로 다닐 메드베데프(5위·러시아)의 코트에 날아들었다. 마지막 공 하나에도 혼신의 힘을 불어넣었지만, 사실 나달의 기운은 빠질 만큼 빠져있었다. 이 공을 받은 메드베데프라고 디를 게 없었다. 긴 팔을 가까스로 뻗어 백핸드로 받아쳤지만, 공은 길고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갔다. 결국 나달이 선 코트 끝자락 베이스라인을 살짝 넘어 밖으로 떨어졌다. 나달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 관중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나달은 이제야 안도한 듯 바닥에 대(大)자로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내 전광판에 찍힌 소요시간은 4시간51분. 현지시간으로 오후 4시에 시작된 경기는 풀세트를 채우고 밤 9시가 거의 다 돼서야 끝났다. 남자 프로테니스(ATP) 투어를 주름잡는 ‘빅3’의 마지막 생존자 나달과 20대의 반란을 주도하는 선봉장 메드베데프의 승부는 그만큼 치열했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명승부였다. 나달이 올 시즌 ATP 투어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나달은 9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메드베데프를 3대 2(7-5 6-3 5-7 4-6 6-4)로 제압했다. 이로써 나달은 2017년 이후 2년 만에 이 대회 우승을 탈환했다. US오픈 정복은 통산 4번째(2010·2013·2017·2019년)다.
나달은 올 시즌 2번째, 개인 통산 19번째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메이저 최다 우승자인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20승·3위·스위스)를 1승 차이로 추격했다. 페더러의 황제 타이틀은 내년 중으로 나달에게 넘어갈 수 있다. 나달, 페더러와 함께 빅3를 이루고 있는 세계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의 경우 메이저 16승으로 다소 간격이 벌어져 있다. 조코비치의 경우 페더러와 타이기록을 만들려면 내년 중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정복해야 한다. 나달이 조코비치보다 먼저 페더러를 앞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나달은 이번 승리로 ‘클레이 코트’에서만 강하다는 편견을 다시 한 번 깨뜨렸다.지난 6월 진흙 코트인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고 3개월 만에 하드 코트인 US오픈을 정복했다. 조코비치와 메이저대회를 2승씩 분할해 판세의 균형도 이뤘다.
2010년대 ATP 투어에서 계속되고 있는 빅3의 독주 체제는 계속됐다. 빅3를 제외한 메이저대회 남자 단식의 마지막 우승자는 2016년 US오픈을 정복한 스탄 바브링카(24위·스위스)다. 그 이후 3년간 12회의 메이저대회는 빅3 이외의 승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20대 선수의 메이저대회 정복은 당시 29세였던 앤디 머리(328위·영국)의 2016년 윔블던 우승이 마지막이다.
나달과 결승에서 마주한 메드베데프는 20대의 선봉장과 같았다. 메드베데프는 지난해만 해도 20대 유망주 중 하나였다. 1996년생 동갑내기인 정현(170위)에게 2017년 11월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4강과 지난해 1월 호주오픈 2회전에서 모두 패배했다. 하지만 올 시즌 급성장을 이루면서 세계 랭킹을 5위까지 끌어올렸다. 올 시즌 조코비치를 상대로 2승1패로 앞설 만큼 빅3를 위협하는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메드베데프 앞에 선 나달은 빅3의 자존심과 같았다. 앞서 16강에서 조코비치가 기권하고 8강에서 페더러가 탈락해 이변이 속출한 토너먼트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메드베데프에게 두 세트를 먼저 빼앗고 승리를 잡은 3세트부터 반격을 당해 마지막 5세트 게임스코어 5-4까지 추격을 허용하기도 했지만, 10년을 넘게 쌓은 관록은 패기 앞에서 굴복되지 않았다.
메드베데프는 비록 우승을 놓쳤지만 빅3의 견고한 독주를 저지할 대항마로 떠올랐다. 이번 준우승으로 세계 랭킹 4위를 예약해 빅3를 턱밑까지 추격하게 됐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