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이 밝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동서남북을 찾는 방향감각은 내게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오른쪽과 왼쪽이 어찌나 헷갈리는지, 신발을 잘못 꿰어 신는 일도 다반사다. 고백하자면, 오른쪽 왼쪽을 구분해야 하는 일에 앞서 나는 여전히 꽤 자주, 오른손잡이인 내가 ‘숟가락을 잡는 손’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니까 길을 찾고 방향을 가늠하는 데 내게 주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방향감각이 아닌 일상의 감각이라는 말이다.
내가 네 개의 방위 중에서 ‘서쪽’에 특히 매혹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게 ‘서쪽’은 해가 지는 곳, 저물고 사라지는 곳, 주어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침내 이르러 몸을 숨기는 곳이다. 그러니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나에게 그곳은 미지이고, 결코 알 수 없으므로 나는 한없이 이끌린다. 여행을 가면 일출은 안 봐도 일몰은 한 번쯤 명당을 찾아가 보게 되는데, 사라지기 전 서쪽을 물들이는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사라진 것들의 세계를 향한 무한한 상상이 주로 ‘서쪽’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파키스탄 출신 작가 모신 하미드의 소설 ‘서쪽으로’에는 제목에서 드러나는바, ‘서쪽’의 상상력이 담겨 있다. 이때 ‘서쪽’의 상상력은 지도상의 실제 ‘서쪽’으로 향하는 공간의 이동과 차차 저물어가는 시간의 흐름, 두 가지 모두를 아우른다. 이러한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흐름을 이끄는 인물은 사이드와 나디아. 돈독한 가정에서 신념에 따라 신을 섬기며 착실하게 회사 생활을 하는 청년 사이드와 신앙 문제로 가족과 결별한 뒤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남자들이 자신에게 까불지 않도록 모든 것을 가리는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 나디아는 그들이 사는 도시의 한 수업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다. 시작은 조심스러웠으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점점 깊어지는 감정에 속절없이 빠져드는데, 그들의 감정만큼 격렬해지는 것이 또 있었으니,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이다. 가족이 폭탄테러에 몸이 찢기고, 종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웃의 목이 잘리고, 잘린 사람의 머리로 축구를 하는 전쟁의 광기를 피할 방법은 다른 나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검은 문을 찾아 ‘서쪽으로’ 가는 것. 사이드와 나디아는 고향을 버리고 이방인이 되는 모험을 택한다.
그리스의 미코노스, 영국의 런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사이드와 나디아는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사실적인 상황과 판타지적인 설정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옷을 입은 ‘서쪽’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바다를 표류하거나 국경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절차도 없이 ‘문’을 통해 다른 나라에 발을 내디딜 수 있다고 할지라도, 고향을 버리고 ‘난민’이 되어 도착한 그곳의 생활이 평탄할 리 없다.
그곳에서의 삶 역시 그들에겐 또 다른 전쟁이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모습도 변해간다. 검은 문으로 빠져나간 그들의 ‘서쪽’이 여지없이 비루해서 읽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들이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와 별을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알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생’이라는 가치를 위해 ‘서쪽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지난 시간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이 소설은 디아스포라 문학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사랑 이야기이고, 판타지인가 하면 더없이 현실적이다. 이러한 다양한 결이 읽는 즐거움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사이드와 나디아와는 달리) 평생 같은 집에서 살아온 노인을 그린 장면에서는 큰 깨달음도 있었다. 한때 그 길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알았으나, 빠른 속도로 변해버린 그곳에서 더 이상 아는 이웃이 없게 된 그 노인 역시 어딘가로 이주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우리는 모두 시간을 통과하는 이주자들이라는 것. 그렇기에 ‘난민’의 삶을 접한 적 없음에도 사이드와 나다이의 여정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시간의 ‘문’을 통과하여 쉼 없이 ‘서쪽으로’ 가고 있는 중일 테니.
<김필균·출판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