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 규제 대응 방안으로 ‘한·미·일 전략물자 수출통제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무조건적인 반도체 소재 국산화가 ‘해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이미 긴밀한 글로벌 가치사슬(Value Chain)로 엮여 있어 무역을 포기하면 양국 모두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2일 서울 연세대 신촌캠퍼스 상경대학 대우관에서 연세대 경제연구소·한국경제연구학회·한국경제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국제환경 변화와 한반도 경제협력’ 세미나에선 ‘한·일 무역 갈등의 원인과 해결방안’ 이라는 주제로 토론이 오갔다. 발제에 나선 왕윤종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반도체 소재를 무조건 국산화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좋은 대안도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지난 7월부터 반도체 핵심소재 ‘국산화’를 강조해왔다. 일본의 전략 물자 수출 통제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왕 교수는 반도체 산업을 설계와 장비, 공정, 소재로 분류하면서 “장비는 국내 기업 중 삼성전자 이외엔 자체 역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강점은 설계와 공정인데 소재는 일본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한·일 양국은 비교우위가 확실한 분업 체계를 오랫동안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왕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긴밀한 가치사슬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느 하나라도 무역을 중지하면 양국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도 삼성과 SK하이닉스 없이 생존할 수 없다”며 “한국 반도체 산업을 죽이기까지 하는 강수는 ‘자충수’기 때문에 실현되기 힘들다”고 내다봤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도 한·중은 중국의 기술추격으로 ‘경쟁관계’지만 한·일 관계는 엄연한 ‘협력 관계’라고 주장했다. 정 연구위원은 “일본이 오랜 기간 축적한 고부가가치 기술은 여전히 한국이 공급받아야 한다”며 한·일 무역이 유지돼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왕 교수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한·미·일 전략물자 수출통제 협의체’다. 외교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의 중재로 무역 갈등을 해소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주도로도 소재·부품 산업 협력 기구를 출범시켜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일본과 중국이 상호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폴리이미드 공동학회’가 그 사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이전 세션에서 “다자주의 체계가 중요한 세계화된 시장에선 국가가 정치적 논리로 간섭해선 안된다”며 정치 갈등으로 변질되고 있는 한·일 무역 갈등을 간접적으로 경계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