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져 식민통치에 항거한 강우규(1855.7~1920. 11) 의사의 의거가 100주년을 맞았다.
1855년 7월 평남 덕천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를 잃은 강우규 의사는 한의학과 한학을 공부했다. 함남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재력가가 된 강 의사는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설립하며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강 의사는 북간도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친다.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1917년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유랑 중이었던 조선인들을 규합해 훗날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는 신흥동을 개척했다. 같은 해 그는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돼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1919년 국내의 3·1 만세운동에 호응해 만주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강 의사는 그해 5월 노인동맹단에 참가해 조선 총독을 폭살할 계획을 세운다.
만주에서 서울로 이동한 그는 안국동 김종호 집에서 숙식하며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사진과 부임 정보를 수집했다. 마침내 9월 2일 현 서울역이 위치한 남대문 정거장에서 총독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투척했다.
의거로 인해 일제 경찰 등 37명이 부상했지만, 애초 목표였던 총독 폭살에는 실패했다. 의거 16일만인 9월 17일 사직동에서 일제 앞잡이 김태석에게 체포된 강 의사에게 일제는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갇혀있던 강 의사는 아들에게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무슨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같은 해 11월 29일 사형 집행 당시 일제 검사가 감상을 묻는 말에, 강 의사는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며 마지막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정부는 강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박실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