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추락, 재기… 스물세 살 정현의 ‘인생 랠리’

입력 2019-09-01 15:55 수정 2019-09-01 16:05
정현(왼쪽)과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1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3회전을 마치고 네트 너머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상, 추락, 그리고 재기.’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23·세계 170위)은 20개월 동안 나이에 걸맞지 않는 굴곡을 겪었다.

남자 프로테니스(ATP) 투어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에서 4강 진출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지난해 1월, 정현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노바크 조코비치(1위·세르비아) 라파엘 나달(2위·스페인) 로저 페더러(3위·스위스)의 3강 구도가 좀처럼 깨지지 않는 ATP 투어에서 메이저 4위는 세계 정상과 어깨를 견준 성적이다. 정현은 그해 4월 2일 세계 랭킹 19위에 올랐다.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은퇴·최고 36위)도 도달하지 못한 이 랭킹을 3주나 지켰다. 그 이후 10개월간 20위대 밖으로 밀려나는 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성’이었다. 하지만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정현은 지난 2월 ABN 암로 월드챔피언십을 끝내고 찾아온 허리 부상으로 5개월을 통째로 쉬었다. 랭킹은 이제 170위까지 곤두박질쳤다. 지난 7월 말 챌린저급 투어에서 복귀해 한 달간 차근차근 승수를 쌓고 출전한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US오픈은 재기의 성패를 가늠할 시험 무대였다. 정현은 나달에게 가로막힐 때까지 5전 전승 질주하며 재기의 ‘청신호’를 밝혔다.

정현은 1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3회전에서 나달에게 0대 3(3-6 4-6 2-6)으로 졌다. 이로써 정현은 2017년 프랑스오픈(3회전 진출)과 지난해 호주오픈(4위)에 이어 개인 통산 세 번째 메이저대회 단식 3회전 진출로 대회를 마감했다. 이 대회에서 확보한 상금은 16만3000달러(약 2억원)다.

정현은 나달을 상대로 공격 성공에서 20대 28로 뒤처진 반면, 실책은 37대 26으로 11개나 많았다. 이 틈에 브레이크 포인트 기회는 한 번도 정현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정현은 서브에이스에서 5대 4로 유일하게 나달을 앞질렀다. 나달의 벽은 이변의 행운으로 균열을 낼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정현은 결승에서나 만날 법한 나달에게 16강 문턱에서 가로막혔지만, 앞선 예선 3경기와 본선 2경기를 모두 승리해 재기의 신호탄을 쐈다. 특히 어네스토 에스커베이도(206위·미국)와 본선 1회전, 페르난도 베르다스코(34위·스페인)와 2회전에서 연달아 3시간30분 안팎의 풀세트(5세트) 혈전을 벌이고 거둔 집념의 승리는 다음 시즌 재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정현은 US오픈 최종 성적에 따라 랭킹을 140위 안팎까지 끌어올릴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상승세만 유지하면 100위권 재진입도 가능하다.

정현은 “100점 만점은 아니지만, 부상 공백 이후 메이저대회에서 예선 3경기를 치르고 본선에서 두 차례나 5세트 경기를 갖고도 부상 없이 마친 점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전체적으로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나달은 1시간59분을 소요한 이 경기를 마치고 정현에게 다가가 악수를 권했다. 네트 너머로 맞잡은 오른손으로 정현의 가슴을 두 차례 두드려 격려하기도 했다. 나달은 경기를 마친 뒤 “정현이 건강만 유지하면 어떤 상대를 만나도 좋은 경기를 펼칠 선수”라며 “나도 부상을 경험했다. 극복은 매우 힘든 과정이다. 이 대회가 정현에게 큰 의미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