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뜯어먹은 을’…“부품 공급 끊겠다” 협박해 38억 챙긴 하청업체 대표

입력 2019-09-01 11:26 수정 2019-09-01 12:41
부품 공급을 중단하겠다며 현대자동차 1차 협력업체를 협박해 수십억원을 뜯어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차 협력업체 대표에게 1심 법원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울산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박주영)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공갈 혐의로 기소된 A씨(52)에게 이같이 선고했다고 1일 밝혔다. 이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으며, 배심원 전원이 유죄 평결을 내렸다.

판결문에 따르면 현대차 2차 협력업체 대표인 A씨는 지난해 6월 평소 부품을 공급하던 1차 협력업체 2곳에 ‘상생 환경 요청의 건’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냈다. 각각 19억원과 17억원을 지급하지 않으면 부품을 계속 납품하는 개별계약을 체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결국 피해 업체들로부터 각각 19억원과 18억7000만원 등 모두 37억7000만원을 받아 챙겼다.

일반적으로 1차 업체의 지배력에 영향을 받기 쉬운 2차 업체가 도리어 1차 업체를 상대로 이른바 ‘갑질’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은 자동차 생산 시스템과 협력업체 계약 환경 등의 요인 때문이다.

현대차는 재고 비용 절감을 위해 재고 부품을 1∼2일 치만 보유하면서, 부품과 완성차 생산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한다. 1차 업체들은 제때 부품을 납품하지 못할 경우 차종별로 분당 약 77만∼110만원의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구조다. 또 적기에 납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면 앞으로 입찰에서 배제될 위험도 있다.

이 때문에 당장 부품 대체 공급원을 구하기 어려웠던 피해 업체들은 2차 업체의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과거 현대차 연구소에서 장기간 근무한 경험이 있어 이와 같은 1차 업체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 조사에서 A씨는 공장 신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납품 중단을 빌미로 거액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에서 검찰은 A씨에 대해 징역 7년을 구형했다. 배심원 7명은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리면서도, 양형은 최소 징역 2년 6개월에서 최대 징역 7년으로 의견이 갈렸다. 재판부는 배심원 판단을 고려해 징역 4년을 택했다.

재판부는 “피해 회사들이 그리 큰 규모 회사가 아니고, 이 사건으로 수백명 직원을 둔 해당 회사들이 상당한 경영상 위협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 회사들이 피고인에게 부당한 거래행태를 보였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피고인은 이 사건을 종속적 관계에서 벌어진 사안인 것처럼 주장하며 범행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동차 생산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직서열 생산방식’에 부당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피고인은 오히려 이런 방식의 맹점을 악용해 자신의 경영상 판단 실패 등 모든 비용을 1차 업체들에 전가했다”며 “다만 피고인이 범행 당시 상당한 경영상 압박 상태에 있었던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