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겨냥한 막말을 지상파 방송에서 그대로 내보내는 등 혐한 감정이 고조되는 것에 반대하는 일본 내 자성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차별·혐오 발언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단체 ‘크랙(C.R.A.C.)’은 지난 31일 TBS방송국 계열 민영방송 CBC의 나고야(名古屋) 본사와 도쿄(東京)지사 앞에서 ‘고고스마’ 폐지 촉구 집회를 열었다. 고고스마는 CBC의 와이드쇼(방담 형식의 정보 프로그램)로, 지난 27일 “일본 남성도 한국 여성을 때려야 한다”는 한 패널의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했다. 일본인 여성 여행객이 한국인 남성에게 폭행당한 사건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패널은 “한국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반일 분위기를 만든 가운데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랙은 이 방송사 대표를 향해 발표한 항의문에서 “고고스마의 출연자가 민족차별과 성폭력을 선동했다”며 “제작진은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방송을 한 것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지 밝히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특히 노마 야스미치 크랙 대표는 “(해당 발언이) 일본 남성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면서 “일본인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지적했다.
집회 참가자들도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를 용서하지 않는다’ ‘고고스마 폐지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같은 날 도쿄 지요다구 한국 YMCA에서는 아베정권의 ‘한국 때리기’를 성토하는 ‘한국이 적인가-긴급집회’가 열렸다. 이는 지난달 말부터 ‘한국은 적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온라인 서명운동을 주도해 온 일본인들이 오프라인에서 모이는 자리였다. 이들은 성명과 서명운동을 통해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비판해왔다.
이날 집회에는 350여명의 일본인이 모였다. 220석 규모의 행사장이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 행사장은 집회를 찾은 일본인들로 복도까지 가득 채워졌고, 일부는 복도에 서 있을 공간마저 찾지 못해 발길을 돌렸다.
서명운동을 주도한 인사 중 한 명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집회에서 “아베 총리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반대하며 한국을 상대하지 않겠다고 결단한 뒤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수출 규제 조치를 강행했다”며 “이후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미일 동맹의 강화와 중일 관계의 안정적 유지’라고 주장하는 주간지 보도가 이어졌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아베 총리의 ‘한국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정책’이 향해가는 곳은 평화 국가 일본의 종말”이라고 강조했다.
이타가키 유조(板垣雄三) 도쿄대 명예교수도 “2차대전의 가해국 중 뒤처리가 전혀 안 된 나라는 일본뿐”이라며 “이는 일본이 침략 전쟁, 식민지 지배 등 무엇 하나 확실히 반성을 안 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취한 조치는 한국을 차별하면서 과거를 반성하지 않아 온 자세가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부뿐 아니라 일본 시민 모두 (과거의 잘못을) 마주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행사 주최 측에 따르면 온라인 서명운동 참가자는 30일 기준 9300명을 돌파했다. 서명 운동은 와다 명예교수 등 일본의 학자, 변호사, 언론인, 의사, 전직 외교관, 시민단체 활동가로 구성된 78명이 지난달 25일부터 진행해왔다. 이들은 서명 운동과 함께 발표한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마치 한국이 ‘적’인 것처럼 다루는 조치를 하고 있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잘못”이라며 “아베 총리는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사이를 갈라놓고 양국 국민을 대립시키려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