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저마다 만발하는 시기가 다르다. 피지 않았다고 꺾는 우를 범해선 안 되는 이유다.
31일 서울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열린 ‘2019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서머 시즌 결승전에서 그리핀이 또 고개를 숙였다. 부활에 성공한 SK텔레콤 T1의 빼어난 경기력이 눈부신 한판이었지만 동시에 그리핀의 부담이 물씬 묻어나는 경기였다. 넘치는 상상력을 십분 발휘해온 그리핀은 왜 손가락이 굳을 수밖에 없었을까.
#아직 ‘만렙’이 아니다=2012년 처음 LCK가 출범하고 어느덧 7년이 흘렀다. e스포츠 역사로 보면 적잖은 기간이다. 그리핀은 LCK 무대에 발을 디딘 지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신예가 3회 연속 결승에 오른 저력은 대단한 업적이라고 평가할만하다.
그리핀은 여전히 신예이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리핀의 성장은 이번 결승전 ‘쵸비’ 정지훈의 활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지훈은 1세트에서 잇달아 데스를 허용하는 악재 속에서도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부단히 찾았다. 이후 그는 패색이 짙은 와중에도 슈퍼플레이를 하며 반전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지난 스프링 결승 무대에서 크게 흔들렸던 것을 감안하면 크나큰 발전이다.
#그리핀의 파란, 그리고 공로=지난해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 LCK의 충격적인 조기 탈락은 혁신에 대한 강한 요구로 이어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리핀의 출현이 LCK에 변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실마리가 됐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 현상은 올해 초부터 두드러졌다. 그리핀은 더 이상 변화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국 지난해 롤드컵에 올랐던 세 팀이 올해 스프링 시즌 강등권 경쟁을 벌이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만큼 LCK는 누구든 상위권이 될 수 있는, 상향 평준화된 리그가 됐다.
엉뚱하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상상력은 평범한 길목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상력은 ‘프리 롤(free role)’에서 비로소 발현된다. 그리핀은 아직 레드 카펫이 깔린 길보다 투박한 들판이 어울린다. 좀 더 뛰놀 수 있게 부담을 거둬야 하지 않을까.
#아직 남은 이야기, 롤드컵=그리핀과 SKT가 나란히 롤드컵에 나간다. 지난해의 실패가 더 큰 기대를 하게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두 팀의 시너지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이 과거 ‘롤드컵 신화’를 쓴 이면을 살펴보면 최소 둘 이상의 LCK 팀이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혼자서는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롤드컵에서 2013년부터 5년간 쭉 우승컵을 들었는데, 모든 대회에서는 최소 2개 팀이 준결승에 올랐다. 이들은 ‘e스포츠 최강국’이라는 기치 아래 스크림(연습 경기) 등으로 서로 도우며 좋은 시너지를 냈다. 때론 상성이 좋지 않은 해외 팀을 다른 팀이 대신 꺾어주며 결승을 ‘한국 내전’으로 만들기도 했다. 가까운 예로 지난 2017년, 삼성(현 젠지)은 그룹 스테이지(16강)에서 RNG에 2연패를 당했지만, 이후 준결승에서 SKT가 RNG를 꺾어주며 재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대회 우승컵을 삼성이 들었다.
이다니엘 기자 d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