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지도부 검거작전과 테러 위협, 집회 불허에도 불구하고 31일 홍콩 시내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진행됐다. 경찰이 집회를 불허하자 ‘종교 집회’와 ‘쇼핑 활동’을 명목으로 내세워 모인 시민들이 도심 거리를 가득 메웠다. 홍콩 시민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홍콩 독립’ ‘시대 혁명’ ‘홍콩 해방’ 등 구호를 외치며 홍콩 섬 코즈웨이베이에서 센트럴까지 끝없는 행렬을 이어갔다. 홍콩 매체는 이날 시위에 ‘저항의 날’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홍콩 재야단체인 민간인권전선(민전)은 31일 도심 센트럴 차터가든 공원에서 갖기로 했던 집회를 전날 전격 취소했으나 시위대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당초 민전이 집회를 예고했었던 오후 2시 반을 넘어서자 차터가든에는 시민들이 속속 몰려들기 시작해 3시 이후부터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은 2014년 8월 31일 중국이 홍콩 행정장관 간접선거제를 결정한 지 5년째 되는 날인데다 최근 시위 지도부에 대한 검거와 백색테러 등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홍콩 시민들은 경찰이 집회를 전면 불허하자 사전 신고가 필요없는 종교 집회와 자유로운 쇼핑 활동을 내세워 모여들기 시작했다. 2014년 ‘우산혁명’의 상징적 인물로 전날 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난 조슈아 웡은 코즈웨이베이에 나타나 “홍콩섬 주변에서 쇼핑을 하려고 한다”며 “백색 테러에 맞서 싸우자”고 말했다.
기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1000여명의 시민들은 오후 완차이 지역의 한 체육공원에서 ‘종교 집회’를 가진 뒤 홍콩 감리교회를 지나 센트럴 지역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당초 차도를 점거하지 않고 인도로 걷던 시위대는 3시를 넘어서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자연스럽게 왕복 6차선 도로를 점거하게 됐다.
시위대 사이에서는 성조기를 무더기로 들고 나온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최근 홍콩 경찰의 시위 지도부 검거작전과 정체불명의 백색테러에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퀸즈웨이 플라자에서 만난 레이 리(27)는 “경찰이 아무리 시위 지도부를 잡아가도 소용없을 것”이라며 “우리는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참여하고 있으며, 지도부는 실체가 없고 우리 한 명, 한 명이 모두 지도부다”라고 말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날 시위를 보도하면서 ‘저항의 날’이란 제목을 달았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 “자유를 위해 싸우자”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최근 홍콩 시위대는 송환법 철회보다 홍콩 민주화의 핵심인 ‘행정장관 직선제’를 최우선 요구사항으로 내세우고 있다.
입법회 건물 주변에 모인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욕설을 하고 레이저빔을 쏘는 등 과격해지자 경찰은 5시30분쯤 최루탄을 쏘며 해산에 나섰다. 경찰은 또 물대포를 시위대와 대치하는 정부 청사 부근에 배치해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자 응사를 했다. 시위대는 경찰을 향해 벽돌 등을 던지면서 맞서는 등 양측의 충돌은 한층 격렬해졌다.
경찰의 본격적인 해산 작전에 밀리던 시위대가 완차이 지역 오조 호텔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불을 지르는 바람에 호텔 문앞까지 화염이 번지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불길이 호텔 입구 계단까지 번지자 처마에 있던 스프링클러가 작동했고, 긴급 출동한 소방관들이 진화에 나서 위기를 넘겼다.
최근 홍콩 시내에서는 시위 지도부가 잇따라 체포되고 백색 테러가 일어나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홍콩 입법회의 제레미 탐 의원과 아우 녹힌 의원이 30일 경찰의 시위대 해산을 방해한 혐의 등으로 경찰에 체포됐다.
조슈아 웡과 데모시스토당 당원 아그네스 차우는 30일 아침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다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홍콩 민족당 창립자 앤디 찬과 홍콩대 전 학생회장 엘시아 순, 사틴구 의원 릭 후이 등도 29일 밤부터 잇따라 체포됐다.
민간인권전선의 지미 샴 처킷 의장은 29일 오후 자신의 비서인 라우콕와이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마스크를 쓴 괴한 2명에게 야구 방망이로 습격을 받았다. 지난달 위안랑에서 발생한 백색테러를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했던 맥스 청은 타이포 경찰서 부근에서 쇠파이프를 든 4명의 괴한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갔다.
홍콩 시위대에 대한 체포와 백색테러가 난무하자 민간인권전선은 31일 홍콩 도심에서 열기로 했던 시위를 하루 앞두고 전격 취소했다.
하지만 경찰의 집회 불허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경찰과 충돌을 빚음에 따라 홍콩 정부 및 중국 본토의 시위 대응 방식이 어떻게 달라질지 주목된다.
시위대는 1일에도 홍콩 국제공항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키로 하는 등 반정부 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홍콩 경찰은 월요일인 다음달 2일 홍콩 노동조합연맹 등이 계획하는 집회도 안전상 이유를 들어 불허했다.
홍콩=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