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우리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에 이례적으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한·일 관계 악화가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의 근간을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제동을 걸고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한·일 갈등이 끝내 안보 분야로까지 불똥이 튀면서 피로감을 표출한 측면도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2일(현지시간)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캐나다 외교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지소미아 파기와 관련해) 한국 측 카운터파트(강경화 외교부 장관)와 오늘 아침에 통화했다”며 “한국이 그런 결정을 내린 데 실망했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은 (한·일) 양국이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대화하기를 촉구해왔다”며 “미국은 양국이 관계를 제자리로 돌려놓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실망했다(disappointed)’는 동맹국을 향한 미국의 외교적 수사로서는 이례적으로 강력하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터키의 미국인 목사 억류, 러시아 미사일 구매와 관련해 ‘실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미국과 터키 간 관계는 현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의 위기가 거론될 정도로 악화된 상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미국은 지소미아를 파기한 우리 정부에 최고 수위의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초 미국은 우리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방침 발표 직후 국방부를 통해 비교적 낮은 수위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 국방부는 데이브 이스트번 대변인을 통해 “한·일 양국이 이견 해소를 위해 협력하기를 바란다”고만 밝혔다. 하지만 이스트번 대변인은 몇 시간 후 추가 논평을 내고 “강한 우려와 실망감을 표명한다”고 수위가 한층 센 입장을 내놨다.
국무부는 더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국방부 논평에 나타난 ‘강한 우려와 실망’과 함께, “문재인정부의 이번 결정은 미국과 동맹의 안보 이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직면한 심각한 안보 도전에 대해 문재인정부가 깊게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미 정부 소식통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미국이 이해하고 있다는 청와대 관계자 발언을 두고 우리 언론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공식 입장이 시간차를 두고 대폭 강경해진 건 행정부 고위층의 의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의 첫 발표로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고 더욱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이 지소미아 파기와 관련해 미국과 사전 협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지난 22일 담화에서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가 “지역 안보환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비슷한 표현이 국무부 논평에도 등장하고 있어 미·일 간 모종의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도 잇달아 표명하고 있다.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 연합사령관은 미국의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소미아 파기는) 매우 불행한 일”이라며 “이번 결정으로 지난 70년 동안 지역 내 번영과 안정을 이끈 한·미·일 공조 체제가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브룩스 전 사령관은 “향후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가 동맹의 해체를 더 적극 공략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고도 평가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