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상을 받았을 땐 그냥 얼떨떨했어요. 그 다음에 또 받고, 또 받고, 계속되니까 차츰 실감이 났죠. 주변에서 ‘부담되지 않느냐’고들 물으시는데, 일단 개봉을 하고 나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상에 너무 의미를 두진 말자는 생각이에요.”
영화감독으로서 이토록 화려한 데뷔가 또 있을까. 첫 장편작으로 제69회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대상, 제45회 시애틀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 제36회 예루살렘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 데뷔작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무려 25관왕을 달성했다. 영광의 주인공은 영화 ‘벌새’의 김보라(38) 감독이다.
20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김 감독은 “해외 관객들에게도 이렇게 공감을 얻을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상영이 끝난 뒤 제 손을 잡고 우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한편으론 신기하고 감사했죠. ‘클리셰를 피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것’이라는 대학원 교수님의 말씀을 철학처럼 새기고 있는데, 그 말을 몸소 느낄 수 있었어요.”
오는 29일 개봉하는 ‘벌새’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을 배경으로 중2 소녀 은희(박지후)의 성장담을 그린다. 1초에 90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사랑받기 위해 서툴지만 부단한 노력을 하는 은희는 자신만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관계의 붕괴를 겪는다. 지극히 개인적인데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여서 공감되는 지점이 많다.
“자전적인 이야기냐고 물으시면 대답은 ‘예스’도 ‘노’도 아니에요. 어린 시절 느꼈던 저의 개인적인 감정들이 적용됐지만, 시나리오 수정 과정을 거치며 허구의 극영화가 만들어졌죠. 아주 내밀한 감정과 극화된 에피소드들이 절묘하게 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은희의 감정들은 제가 한국사회를 살면서 겪은 생각들과 맞닿아 있거든요.”
김 감독은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을 나눠 따로 수업했다. 성적으로 계급을 구분지은 것”이라며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조건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것이 개인의 일상에 얼마나 촘촘히 영향을 미치는지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극 중 은희처럼 ‘대한민국 교육열의 중심지’ 서울 대치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친구들끼리 사는 아파트가 몇 동이고, 아버지 직업이 뭔지 다 꿰고 있었어요. 기이하죠. 본질이 아닌 것으로 서로를 재단하는 행태는 전부 어른에게서 배운 거예요. 여전히 사회는 야만적이에요. 그런 사회 구조에 적응해 잘 사는 건, 피가 철철 나는 행복이 아닐까요.”
동국대 영화과를 거쳐 콜롬비아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한 김 감독은 꾸준히 단편 작업을 해 왔다. 리코더를 잘 불어 사랑받고 싶었던 초등학생 은희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리코더 시험’(2011)을 장편화한 게 ‘벌새’다. “장편 연출에는 체력 안배가 중요하더라고요. 단거리만 뛰다가 갑자기 장거리를 뛰는 기분이었어요(웃음).”
김 감독은 “학창시절엔 영화를 통해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게 좋았다면, 지금은 깊이 있는 내용과 비주얼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진 웰메이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커졌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번 작품으로 많은 호평을 얻었지만 저 스스로는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실력을 가꿔나가고 싶다”고 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