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총기난사 범죄의 사상적 토대 된 환경주의…“증오의 녹색화”

입력 2019-08-19 18:11 수정 2019-08-20 13:38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의 월마트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지 하루 만인 4일(현지시간) 시민들이 사고 지역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 철야 기도회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올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와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십명을 학살한 극우 성향의 총격범들이 그간 좌파 진영의 이념적 자산으로 여겨졌던 ‘환경주의’를 사상적 토대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기존의 극우 성향 증오범죄자들처럼 이민자를 향한 분노, 백인우월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을 넘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경주의를 적극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8일(현지시간) 이들을 조사한 수사당국을 인용해 “두 남성이 각자 온라인에 게시한 글을 보면 이전의 증오범죄 패턴들과는 달리 인구 과밀 상태와 환경 파괴에 대한 또다른 강박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지난 3월 뉴질랜드와 이달 초 미국에서 발생한 대형 총기난사 사건의 배경에 ‘에코파시즘’(eco-fascism)이라는 공통의 이념적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코파시즘은 ‘환경 및 동물권 보호’라는 미명하에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인간 개개인의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사상을 뜻한다.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며, 독일 나치주의를 에코파시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나치 정권은 ‘혈통과 토양’ 슬로건을 내세우며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정화하기 위해 외부인과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 파괴의 원인을 타민족에 두며 이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한 것이다. 실제 나치 정권은 ‘동물보호법’과 ‘국가자연보호법’ 등 환경보호법률을 제정하는 등 생태주의적 가치를 강조하고 이를 유대인 학살의 명분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지난 3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 사원 2곳에서 무슬림들을 겨냥한 총기 난사로 51명의 목숨을 빼앗은 호주 출신 총격범 브렌턴 테넌트(28)는 자신의 정체성을 ‘에코파시스트’로 규정했다. 그는 이민자들의 출생률에 격노하며, 그들의 높은 출생률이 인구 과잉을 낳고 결국 환경 오염을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이달 초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의 한 월마트 매장에서 총기를 난사해 22명을 사망케 한 패트릭 크루시어스(21)도 테넌트와 유사한 불만을 토로했다. 크루시어스는 범행 전 성명을 통해 “수질 오염, 플락스틱 쓰레기, 미국 소비자 문화가 미래 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는 “평생동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준비해왔다”고 강조했다.

WP는 두 사건이 벳시 하트만 햄프셔대 교수가 ‘증오의 녹색화’라고 부르는 에코파시즘의 극단적 사례라고 분석했다. 많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현재 자연 보호와 인종 배제 사이의 연관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환경주의 이슈에 천착하고 있다. 지난 몇년간 주류 환경 운동은 사회 정의와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지만, 물밑에서는 극우주의자들과 혐오 단체들이 ‘녹색 메시지’를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삼기 위해 애써왔던 것이다.

환경 단체 관계자들은 청년 세대가 인종차별주의와 이민자 배척 성향을 받아들이도록 유혹하기 위해 백인민족주의자들이 환경 메시지를 악용하는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있다. 환경 정의 전문가인 무스타파 산티아고 알리 국립야생동물협회(NWF) 부대표는 “증오는 언제나 무언가를 붙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며 “그것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자신들 주변에 있는 생태학적 언어들을 사용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20년 이상 에코파시즘을 연구해 온 하트만 교수는 “환경주의자들은 묵시론적 담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그런 담론들이 종말론적 백인 민족주의에 쉽게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