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일왕, 패전 7년 뒤 재군비 및 개헌에 의욕

입력 2019-08-19 16:34 수정 2019-08-19 16:48
히로히토 일왕이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27일 도쿄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과 만났다. 일본 위키피디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했을 때 항복을 선언한 히로히토(1901~1989년·연호는 쇼와) 일왕이 패전 후 7년이 지난 1952년 재군비와 개헌의 필요성에 의욕을 보인 것이 기록으로 확인됐다. 또 히로히토 일왕이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축하행사 때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표명하려 했으나 일본 정부 반대로 무산된 것도 드러났다.

NHK는 18일 초대 궁내청(일본 정부의 왕실 담당 부처) 장관 다지마 마치지가 히로히토 일왕과의 대화를 기록한 ‘배알기(拜謁記)’의 내용을 공개했다. 다지마는 1948년부터 5년간 궁내청 장관을 역임하면서 600회, 300시간에 걸쳐 히로히토 일왕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NHK는 유족으로부터 18권 분량에 해당하는 ‘배알기’를 제공받아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했다.

‘배알기’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은 다지마 장관에게 패전에 이른 과정 등을 여러 차례 회고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 후 불과 5개월이 지난 52년 2월 “헌법 개정에 편승해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부정적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부분은 다루지 않고 군비에 대해서만 공명정대하게 당당히 개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같은 해 3월 “침략이 없는 세상이면 무장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침략이 인간사회에 있는 이상 군대는 부득이하게 필요하다”고 말했고, 5월에는 “재군비에 의해 군벌이 다시 대두하는 것은 절대 싫지만, 침략을 받을 위협이 있는 이상 방위적인 새로운 군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패전 후 일본은 점령국인 미국의 입김으로 ‘전쟁 포기’와 ‘전력(戰力) 보유 불가’가 명시된 헌법이 만들어졌다. 히로히토 일왕은 일찌감치 이를 바꿀 의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배알기’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은 재군비와 헌법 개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전하려 했다. 이에 대해 다지마 장관이 “헌법상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최근의 전쟁에서 일본은 침략자로 불렸다. 그건 금구(禁句·금지된 말)다”라고 말렸던 것이 드러났다.

NHK의 보도는 공교롭게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전후 첫 개헌을 시도하는 가운데 나와 주목된다. 아베 총리는 전쟁 포기와 전력 보유 불가가 명시된 헌법 9조(평화헌법 조항)에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하는 1단계 개헌에 성공한 뒤 일본을 ‘전쟁 가능국’으로 바꾸는 2단계 개헌을 꿈꾸고 있다.

왕실 전문가인 후루카와 다카히사 닛폰대학 교수는 마이니치신문에 “히로히토 일왕이 개헌과 재군비에 대해 언급했지만 침략에 대비한 자위 수준의 군대일 뿐 옛날처럼 군벌이 주도하는 군대를 재현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지적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또 1952년 1월과 2월에 걸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를 앞두고 “나는 아무래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히로히토 일왕의 발언에는 군부에 전쟁책임을 모두 떠넘기고,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는 속내가 읽힌다.

요시다 당시 총리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책임을 인정할 위험이 있다. 이제 (일왕이) 전쟁이라든가, 패전이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리고 요시다 총리의 뜻에 따라 히로히토 일왕이 일본 국민을 상대로 읽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행사 때의 발언에는 전쟁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내용이 삭제됐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